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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잇따른 성추문 사태로 진통 앓는 문화예술계 ‘증언의 연대’에 무겁게 귀 기울이길
올해 하반기 문화예술계를 강타한 키워드 중 하나는 안타깝게도 ‘성추문’이 될 것 같다. SNS에서 ‘#○○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시작된 피해자의 폭로는 문학, 미술, 영화 등 문화예술계 전반에 성추문이 만연해 있음을 수면으로 드러내며 가해자의 처벌과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는 오프라인 연대로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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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검색어 화면에 ‘문단’이라는 단어를 쳐보곤 흠칫 놀랐다. ‘문단’의 자동 완성 키워드로 가장 먼저 뜨는 말이 ‘문단 내 성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저열한 세계에서 인간을 구원해줄 문학을 빚어내는 문단이 언제부터 ‘성추문의 온상’으로 여겨지게 된 걸까. 국정농단 파문과 맞물려 어지럽고 참담한 날들이다. 지난 5월만 해도 한강 작가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으로 흥성거렸던 문단은 요즘 한껏 위축된 분위기다.
익명의 ‘증언’이자 ‘절규’는 10월 중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처음 세상에 터져 나왔다. 박진성·배용제·백상웅·이준규·이이체 시인 등 성희롱·추행·폭행을 가한 문인들의 실명과 가해 사실을 폭로하는 글이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인기 소설가인 박범신 작가도 편집자들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작품 <은교>에 빗대 한 성희롱 발언이 공개되며 사과하는 등 파장은 일파만파 커졌다.
가해자들의 실명을 폭로한 글들은 SNS를 통해 다시 공유되고 지지를 얻으며 큰 폭발력을 가지게 됐다. 이를 통해 문단뿐 아니라 미술·음악·영화 등 문화계 전반에서 권력관계에 기대 암암리에 자행됐던 성폭력의 진상이 드러났다. 일민미술관 큐레이터,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영화평론가 등이 추가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온라인의 고발, 실질적인 ‘조치’로 이어져

온라인의 연대에 힘입어 고발은 오프라인으로도 번졌다. 서울예대에서 강사로 활동한 황병승 시인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대자보가 서울예대 안산 캠퍼스에 나붙은 것. 문인 성폭력 폭로자를 지지하는 오프라인 연대도 꾸려졌다. 배용제 시인이 가르쳤던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106명으로 이뤄진 모임 ‘탈선’은 배 시인의 성폭행 사실을 밝힌 피해자를 지지하고 배 시인의 자성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문제가 된 문인들의 책을 출판하거나 출판하려 했던 출판사로도 불똥이 튀었다. 은행나무는 당초 10월 말 출간 예정이던 박범신 작가의 새 장편 <유리> 출간을 무기한 연기했다. 가해 시인 다수의 시집을 ‘문지시인선’으로 펴냈던 문학과지성사도 논란에 휘말렸다.
송승언 시인은 온라인 메모장 에버노트에 ‘문학과지성사에 고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출판사의 책임 있는 대처를 촉구했다. 송 시인은 “가해 지목자 다수가 문지에서 시집을 낸 시인들이라는 점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문단에서) 문지가 가진 권력과 그 권력에 대한 문단 안팎의 이미지가 여러 문인이 성폭력 가해자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며 인맥 출판의 통로가 되는 출판 경영 내규 재정비, 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조항 추가 등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문학과지성사는 지난 10월 21일 사고를 통해 유감을 표명한 데 이어 11월 6일 다시 입장을 밝혔다. 문학과지성사는 “그 누구도 문학적 권위를 수단으로 타인을 권력관계 속에 옭아매고 반인간적, 범죄적 행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며 “문제가 드러난 시인들의 경우 출판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대응 조치로는 향후 출판 계약 체결 중단, 기(旣)출간 도서 절판, 계간 <문학과사회> 원고 청탁 중단 등이 포함됐다.

이슈&토픽 관련 이미지문화예술 각계에서 성폭력 고발이 이어진 가운데, 한국시인협회와 한국작가회의에서는 논란이 있던 시인들에게 제명 등 조치가 있을 것을 예고했고, 민주노총 언론노조 출판노협 여성위는 폭력 피해 고발 여성들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영화 <걷기왕>의 촬영에 앞서 제작진의 성폭력 예방교육이 진행됐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증언의 연대’ 목소리 무거운 마음으로 헤아려야

‘#○○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특정 주제어에 대한 글임을 알리는 표시)로 촉발된 ‘증언의 연대’는 문화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각성과 자성의 분위기를 불러왔다. 이번 사태는 그간 우리 사회가 여성을 비하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남성의 시선과 언행을 암묵적으로 용인해왔다는 점에서 ‘개인의 일탈’이 아닌 ‘우리 모두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특히 문화예술계에서 고발이 두드러졌던 건 한 번 ‘이름값’을 얻으면 끝 간 데 없는 권력을 누리는 문화예술계 내 극심한 권력 불균형, 문제가 생겨도 목소리를 낼 통로가 없다는 폐쇄성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실력’보다 ‘인맥’이 우선하는 저급한 관행도 불이익에 떠는 ‘을’들, 피해자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한 문인은 그랬다. “예술계 전체가 이런 저속하고 추잡한 논쟁에 휘말리는 게 참담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문화예술인들이 인간의 존엄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21세기 문학> 가을호에 문단 내 여성 혐오 행태를 폭로해 시선을 모은 김현 시인은 “여성 폭력 문제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 것이고 오늘의 문제라 터진 게 아니라 터질 때가 되니 터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 시인은 “해시태그를 통한 ‘증언의 연대’는 그간 참고 고민하고 활동한 여성들이 피해를 고발하고 나선 주체적인 인식의 결과”라며 “증언-사과-처벌 그리고 그 ‘다음’을 생각해보자는 게 증언의 가장 큰 목적인 만큼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재발 방지를 위한 논의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는 문화계로선 뼈아픈 ‘진통’일 테다. 하지만 들끓는 여론에 잠시 머리를 숙이는 척만 해서는 안 된다. 용기 있는 익명의 목소리들, 그리고 이들을 응원하는 지지의 목소리들을 깊이 헤아리고 무겁게 들어야 한다. 이들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를 걷어낼 ‘희망’이자 ‘전환점’이기 때문이다.문화+서울

글 정서린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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