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람이 작·작창을 맡은 <이방인의 노래>. 2015년 예술의전당에서 초연한 후 국내는 물론 대만, 루마니아 등 해외 공연도 진행하고 있다.
판소리의 마법을 믿고 찾고 선보이는 소리꾼
걸출한 소리꾼 이자람은 세계 곳곳에서 ‘이방인의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 그녀의 두 번째 판소리 단편선 제목이다. 마르케스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 <본 보이지, 미스터 프레지던트(Bon Voyage, Mr. President!)>가 바탕이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인 ‘라사라’ ‘오메로’ 부부 앞에, 고국의 전직 대통령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라사라와 오메로는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숱한 오해
끝에 ‘사람으로서의 대통령’을 만난다. 그들 역시 한 움큼 성장한다. 이자람은 안내자 역과 함께 홀로 이 캐릭터들을 연기하며 “판소리는 마법 같은 장르”임을 증명한다.
11월 초에는 대만에 이 마법 가루를 뿌리고 왔다. 현지
국립극단의 초대를 받아 세 차례 공연했다. 대만 공연 직후
경복궁 인근 카페에서 만난 이자람은 “구체적이면서 감각적으로 잘 놀다 왔다”고 흡족해했다. 특히 ‘관객과의 대화’가
흡족했다고 했다. “관객 분들이 여러 가지를 물어봤어요. 한국에서 정부지원금이 넉넉한지를 묻는 질문부터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에 대한 물음까지. (한국에서 이슈가 된) ‘블랙리스트’ 관련 질문도 나왔어요. 세 번째 공연 날에는 현지 공연 관계자들이 많이 왔죠. 한국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더라고요.” 12월에는 루마니아로 날아가 또
다른 마법의 순간을 선사할 예정이다.
최근 이자람이 개발 중인 신마법은 <아워타운>이다. 미국
극작가 손턴 와일더의 희곡 <아워타운(Our Town)>(1938)을 1980~90년대 서울 오양구 산월동 어느 동네의 삼도연립으로 옮겨와 판소리로 재창작하고 있다. 이자람이 이끄는 단체 ‘판소리만들기-자’가 두산아트센터와 협업하는 작품으로 내년에 정식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지난 9월 워크숍을 통해 살짝 공개된 장면들만으로 ‘수작’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이자람 판 <응답하라 1988>’로 불릴 정도로 당시 정서와 분위기가 배어나왔다. 역시 소리꾼과 고수로만 이뤄낸 그림 같은 순간이다.
삶의 소소한 찰나들(1장)을 지나 사랑과 결혼 등 인생이 무르익는 순간들(2장)을 거쳐 죽음으로 수렴(3장)되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삶의 축소‘판’을 말 그대로 단숨에 경험하게 된다. 당시 공개된 장면은 2막 중간까지였는데, 여럿이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적인 서정성을 펼쳐 보였다.
현대에 그간 웅크리고 있던 향수라는 것이, 11월 중순 ‘상실의 시대’에 그나마 위안을 안겨준 ‘슈퍼문(super moon)’처럼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이자람은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달을 떠올리면서 작창을 했다”고 웃었다. “특히 2막, 3막을 관통하는 것은 달과 태양이에요. 누군가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죽은 다음에도 있고, 한동안은 있을. 어쩌면 인류보다 더 오래 있을 달과 태양이죠. 달과 태양을 마주하는 인간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드는데, 그것이 우리가 삶과 죽음을 감각할 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관객과 함께 달을 보는 시간, 일출을 함께 보는 시간을 나누고 싶어요.”
이와 함께 <아워타운>의 매력은 오감으로 느끼는 판소리라는 점이다. 폴폴 피어오르는 밥 짓는 냄새,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소리, 1980~90년대 시멘트 위에 아무렇지 않게
남아 있어 서걱거리던 모래 소리 등. 이자람의 소리, 고수의
북만으로도 삼도연립에서 복작거림이 들리고 보이고 느껴진다. 이자람은 “우리가 살면서 몇 번씩은 가졌을, 공간 속의
모든 촉각을 담으려고 했어요. 장면들을 만들면서 관객과 같이 감각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려고 했죠”라고 설명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어디서 물 내리는 소리, 옆집에서 엄마가
자녀에게 ‘일어나’라고 외치는 소리. 기억의 공간을 예전으로 가져다 놓고 그 주변을 찾아내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 종로구 세검정에 위치한 연립에서 살고 있는 이자람은 지금도 이런 소리가 들린다고 웃었다. “여름에
창문을 열어놓으면 씻는 소리, 설거지하는 소리, 노래하는
소리, 가족 예배 보는 소리가 다 창문을 넘나들어요. 호호.”
이자람은 작창과 연출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올해는 김애란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음악극 <여보세요>(사진 1)를 무대에 올렸고, 현재 손턴 와일더의 <아워타운>(사진 2)을 판소리로 재창작하고 있다.
인생에 도사린 ‘태풍’의 시간을 지나며
목소리 단 하나만으로 세상의 온갖 의성어, 의태어를 모두
표현하는 세밀함과 일상을 오롯하게 가져오는 관찰력은 세상을 웬만큼 톺아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녀의 어딘가에는 세상의 온갖 것을 담아놓고 숨겨둔 주머니가
존재할 듯한 의심 아닌 의심이 드는 이유다. 이자람에게 이런 영감은 어디서 어떻게 얻냐고 묻자, “세상을 얼마만큼 컬러풀하게 받아들이냐는 물음이냐”는 질문이 되레 돌아온다.
해석하면, 다채로움을 얼마큼 빨아들이고 저장하고 있느냐,
정도일 것이다. “저도 거의 세상을 흑백으로 받아들여요. 그게 숙제죠. 흑백이었던 제 삶이 작업할 때 먼지를 털어내고
비로소 애써 색깔을 입는 느낌이 드는데 그것도 가끔 운이
좋을 때예요. 1년에 8개월 정도는 흑백이고, 4개월 정도는 컬러죠.”
일상이라는 것이 그만큼 귀하다는 방증이다. “반복되지않고, 귀하게 여겨지는 순간들과 맞닥뜨리는 것이 컬러풀한
거죠. 옛 성인들이 늘 말씀하시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매번 깨달을 수는 없어요. 시인, 성인군자라도 그러기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흑백 세상이 먼지를 털어내고 색을 되찾는 대신,
잿빛이 되는 처참한 순간도 있다. 위기를 만나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배신을 당하고, 또는 죽음을 앞두면서 세상이 재가 되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정말 무의미해서 견딜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오는 거죠.
아이의 웃음도 무의미하고, 가족이라는 것도 굴레 또는 억압으로 느껴지고. 모든 것이 다 위험해지는 시간이 와요. 그 시간은 노력한다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든 견뎌야 하는 시간이죠. 1개월이 걸릴지 6개월이 걸릴지 아무도 모르죠.”
이자람은 그 견뎌야 하는 시간을 태풍이라고 이름 지었다. “근데 그 태풍은 인생에서 한 번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 번 오는데 큰 태풍으로 올 때도 있고, 작은 태풍으로
올 때도 있죠. 철이 되면 오는 그런 태풍처럼요.”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면 다행히 볕이 찾아온다. 그렇게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사람들은 또 살고 또 살아간다. “다들 그렇게 살잖아요. 그때 해가 쨍했을 때, 그 밑에 있는 것들을 주워 담아요. 태풍 속에 있을 때 태풍 속에 있는 걸 주워 담고. 그 주워 담은 것들 중에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도 많고.”
이자람의 영감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번졌다가, 창작자의 고뇌로 스며들었다.
소리꾼, 작가, 연출가, 배우, 인디 밴드의 리더…
최근 창작자로서 그녀에게 고뇌를 안긴 건 ‘2016 서울국제공연예술제’를 통해 선보인 음악극(또는 연극) <여보세요>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서울에 올라와 여성 전용 고시원에 살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20대의 ‘나홀로 일상’을 세밀하게 톺아본 작품에 공감하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적인 문제까지 티가 나지 않게 짚어낸 원작이
‘판소리만들기-자’의 심상치 않은 감각으로, 평면에서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옮겨졌다. 근데 이 작품의 소리꾼은 이자람이 아니다. ‘판소리만들기-자’ 단원인 이승희가 무대에 올랐다. 이자람은 작가, 연출 역에 머물렀다. 연출만 맡은 게 처음이던 이자람은 <여보세요> 작업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했다.
“예전부터 해온 질문이었어요. 현재형 질문이기도 하고요. 판소리를 만드는 지금의 작업 형태에서 연출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요. (<이방인의 노래>와 <아워타운>의 연출인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 연출은 솜씨 좋은 드라마투르기이자 기능적인 연출이며 제1의 관객이죠. 자신의 몸을 잘
변형시켜 판소리를 존중해주는 정말 좋은 연출이에요. 지혜를 보고 있으면 연출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자신이 ‘판소리만들기-자’에서 연출을 맡는다면 지금까지 맡아온 연출의 기능과는 다른 연출이어야 한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그래서 <여보세요>에 끝까지 매달려야 했다. 스스로에 대해 ‘결벽증’이라고 느낄 정도로 완벽주의가 있는 사람이라, 연출로서 ‘떳떳했으면 하는 마음’도 굵게 자리했다. 하지만 “마지막 공연이 탐탁지 않았어요. 결국 ‘난
못했다’고 답해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괴롭네요. 시간을 핑계로 또는 시간이 진짜 없어서 집요하게 파고들지 못한 질문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아쉽죠.”
아마 자신에게 ‘퍼포머 기질’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이스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니
“연출로서 해야 하는 것과 인간적으로 ‘나이스한’ 것을 구분하고 조절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여러 가지로 많은 걸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죠.”
지난해 극단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예술감독이 연출한
국립극단의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장녹수를 맡는 등 다양한 장르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 그녀다. 이미 판소리를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 장르를 체화해왔다. <문제적 인간 연산> 역시 한을 극대화한 판소리가 중요한 요소로 사용됐고, 이지나 연출의 뮤지컬 <서편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이자람밴드’로 홍대 신까지 보폭을 넓히고 있다.
비우고, 고민을 멈추지 않으며, 천천히 나아간다
이자람 작품의 또 다른 미학 중 하나는 ‘미니멀리즘’, 즉 비워내는 것에 있다. 화려하고 웅장함에 치중하던 창극이 최근
본연의 소리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자람은 이미 비워냄으로써 최고의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아이러니한 장관’을 연출해왔다.
<이방인의 노래> 역시 기존 이자람이 선보인 작품에 비해 담백하다. 대표작인 <사천가> <억척가>에서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자랑했다. 그녀의 변화에 <이방인의 노래>를 보는
순간부터, 다음 작품에 대한 궁금증이 순식간에 번졌다.
“예전에는 비워내는 것에 대한 강박이 있었어요. 이것저것 이고 지고 다니는 것이 판소리가 아닌 것 같았거든요.
마이크 없이 부채만 있어도 상상의 종점을 찍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모든 정의 또는 모든 규칙은 다시 부서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10년간 판소리를 만들어오면서 ‘판소리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의 종점에는 아무것도 없음, 즉 소리꾼과
부채, 북과 고수만 있어야 하는데 올해 특히 태풍이 지나가면서 판소리조차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 정도로
과도한 태풍이었죠. ‘판소리가 무엇인데’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위축됐죠.”
이자람은 전통을 좋아하고, 전통 판소리가 주는 힘을
믿었고, 특히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 유산을 재산을 증식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사는 데 활용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판소리를 잘해야겠다, 명창이 돼야겠다 등은 그녀의 목표가
아니었다. 소리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자람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름이 알려질수록 권력이 따라왔고, 사람들이 찾을수록 권위가 붙는 걸 느꼈다. ‘너 정도면 이래야 한다’는 시선도 그녀를 좇았다.
“저는 늘 전통에 대해 감사하면서 살아왔어요. 그걸 안고 작업해왔죠. 그런데 그것조차 버려야 하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물려받은 관습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관습적인 생각, 도제 교육이 준 권위의식과 소리꾼과 고수는
어때야 한다는 강박. 이런 것에 대한 도의적인 선 긋기와 모든 순간을 의심해야 할 때가 온 걸 깨달은 거죠.”
결국 누가 만들어놓은 틀을 의심하고 격파해야 하는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려는 노력조차 의심해야 하는
순간이 온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이 적당히 안주하고 눈감으면서 나이를 먹죠. 너무 많이 고민하는 사람은 도망가거나
숨거나 싸우거나 하죠. 적당히, 편안하게 살기 위한 가장 좋은 착각은 국가, 가족인데, 물론 그 가치를 절대 부정하면 안
되죠.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고민을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상이 주는 안도감에서 더 좋은 가치를 찾기 위해서요.”
이자람은 이를 위해 “잘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할 것”이라며 웃었다. “그런 고민을 하기 위해서는 꾸준함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몸이 버텨야 하거든요. 밸런스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죠. 요즘은 철학 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호호.”
판소리 세계의 큐레이터인 이자람을 무대 밖에서 만나는 순간은, 좋은 책 한 권을 담백하게 잘 읽었다는 찰나로 치환된다. 흥미로울 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 좋은 양식이 되는 고민을 자연스럽게 담아가게 된다. 그녀의 작품은
인물에 관객이 자신의 입장을 투영해 바라보거나 전지적 작가 시점 또는 조감도로 관찰할 수 있는데, 실제 이자람과 대면하면 그 거대한 풍경화를 이룬 여러 세밀화를 접할 수 있다. 이자람 특유의 곧고도 정직한, 하지만 엄하지 않은 소리
또는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맥이 탁 풀리면서 그냥 위로를
받게 되는 이유다. 소리와 이야기를 자신과 촘촘히 엮을 줄
아는 이자람은 그 자체로 장르다.
- 글 이재훈
- 뉴시스 기자
- 사진 김창제
- 사진 제공 예술의전당, 서울국제공연에술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