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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춤에는 주인이 있을까?

춤에는 주인이 있을까? 저작권을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있다. 관련 문제가 종종 발생할 만큼 모호하고,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례가 적기 때문에 안무 저작권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법적 저작권은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법적 지위가 아니라, 춤의 저작성authorship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고민하면 문제는 복잡하다. 협업과 공동 창작, 정체성과 공동체, 물질성과 객체 등의 문제가 화두가 되는 동시대의 경향에서 춤의 저작(성)에 대해 고민한다.
저작 개념은 (서양 중심의 사유 체계에서) 예술이라는 관념의 발명과도 맞닿을 만큼 예술의 존재 자체와 밀접한 개념이다. 중세 시기에는 예술 작품에 작가의 이름을 쓰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기술과 예술이 구분되지 않은 시절이고, 더 나아가 근대적 주체라는 개념이 제대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세 이후, 이른바 르네상스라는 흐름과 함께 예술에서도 인간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예술가들은 이름 없는 기술자가 아니라, 자신의 작업에 이름을 써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로부터 우리가 지금 예술이라고 부르는 개념 자체가 발명됐다. 그렇게 저작성 개념은 인간성과 주체, 나아가 자율성이라는 예술과 근대의 핵심 개념과 연동한다.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 역사가 진보한다는 데서 나온 근대라는 개념은 (심지어 그 역사의 진보라는 관념까지도 함께) 복합적으로 성찰된다. 그러한 흐름에 따라 저작성 개념 또한 비판의 심판대에 올랐다. 1960년대에 들어서 롤랑 바르트를 중심으로 펼쳐진 ‘저자의 죽음’에 대한 논의를 생각할 수 있다. 그 이후 예술 작업은 누구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텍스트’의 위상에 놓인다. 이러한 논의는 비슷한 시기에 무용에서도 공동 창작과 협업, 춤과 춤이 아닌 것에 대한 고민을 통해 전위적인 작업을 펼친 저드슨 댄스 시어터 등에 의해 형식적으로도 호응이 이뤄졌다.
저작성의 문제는 춤뿐만 아니라 미술의 미니멀리즘, 나아가 개념미술과 같은 경향 속에서 예술계 전반의 화두가 됐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내세우거나, 자신이 직접 창작하지 않고 다른 이와 협업, 심지어 아예 위탁하는 작업을 통해 예술가들이 저작성을 성찰하면, 예술이라는 이상한 세계에서는 그 힘이 거꾸로 작동했다. 예술가가 권위를 내려놓을수록 그 권위가 더 강해졌다. 새로운 형식을 갈구하는 예술계에서 저작성을 내려놓으려는 실천은 급진적·형식적 창안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냥 더 좋은 예술가를 만들었다. 사실 그들 스스로가 예술가의 위상을 내려놓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진품 보증서나 작업 지시서 등 결국 어딘가에는 자신의 이름을 써놓는 자기모순을 가지기도 했다.
이렇게 저작성에는 역설적이고 복잡한 힘이 작용한다. 이러한 문제는 동시대 무용에서도 계속되고 있는데, 특정 공동체에 개입해 협업하거나, 그들의 존재와 움직임을 그대로 예술 작업으로 매개하는 방법론이 종종 사용되기 때문이다. 무용수가 아닌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가시화되거나, 춤이 아닌 것이 춤이 되고, 춤이라는 경계 자체가 의미 없어지는 미학과 정치가 작동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긍정적으로 볼 측면이 있다. 그러나 특정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의 춤에 그것을 조직하고 예술로 승인할 수 있도록 한 예술가의 이름을 가장 크게 내세우는 것은 더 생각할 문제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예술적 명성을 위해 다른 공동체를 착취하거나, 예술가가 그들을 과도하게 대표·재현representation하는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렇게 공동체에 개입하는 특정한 형식이 아니어도 동시대 안무에서 협업은 보편적 문제이기도 하다. 강력한 저작성을 가진 한 명의 안무가가 모든 동작을 혼자서 창안하지 않고,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움직임을 함께 만드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형식에서 협업이라는 구조 자체가 중요하고, 위계적 안무가의 위상을 성찰하는 문제도 동시대 안무 전반에서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공연에 참여하는 무용수나 퍼포머는 단순히 만들어진 안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공연 예술인 무용이 고정된 물질로 존재하지 않고, 특정 시공간과 물질적 위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 춤이 수행되는 현장에서 관객은 단순한 관조자가 아니다. 고전 형식에서도 관객은 무대 위의 수행자와 다양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고, 비교적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모호한 형식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인간 관객뿐만 아니라, 더 큰 범주의 물질적 위상을 생각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무대 소품, 조명, 건축, 장소 등 수많은 물질적 관계에서 춤은 발생한다.
이렇게 주체와 인간 중심성이라는 개념을 성찰하고, 모든 것을 객체의 연결과 관계로 파악하는 문제까지 나아가면 춤의 주인이라는 개념은 더욱더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예술계는 신화적인 예술가를 욕망하기도 한다. 유명한 예술가를 조명하면서 예술계 전체에 더 많은 관심을 유도하고, 그것을 통해서 예술계가 자본과 활기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 스타 시스템이 있기에 예술가도 신화적 자리를 열망하게 되고, 또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그런 욕망과 에너지로 작동하는 것이 예술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고민이 예술계라는 담론장과 춤을 춤으로 만드는 예술 제도에 대한 문제까지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돌아보자. 저작성의 문제야말로 동시대 예술의 복잡한 힘 관계를 다시 감각할 수 있는 핵심적인 고리가 아닐까.

권태현_큐레이터, 웹진 [춤in] 편집위원

※본 원고는 지면 관계상 편집되었습니다. 원문은 웹진 [춤:i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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