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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이혁래·김정영 감독의 <미싱타는 여자들> 과거의 빛이 현재의 볕이 되는 시간들

기억은 늘 단편적이다. 이야기보다는 그 시절의 정서가 기승전결 없이 순간의 감각과 정서로 남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대부분 기억은 억울하고 분했던 그 시간을 끈질기게 붙잡아 한 덩어리로 만들어둔다. 그런 기억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람의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펼쳐, 그 순서대로 한땀 한땀 소중하게 이어야 한다. 작은 이야기들을 기워 만든 커다란 이야기를 활짝 펼치면 비로소 그 시절이 보인다.

한땀 한땀 기워 만든 이야기

197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에는 집안이 가난해서, 또는 여자라는 이유로 공부 대신 재봉틀을 돌린 소녀들이 있었다. 건조하고 거친 그녀들의 삶이지만 저마다 가슴에 품은 꿈 하나는 버릴 수 없어서, 삶을 배울 수 있는 노동교실을 삶의 희망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소녀들은 시다라는 이름이 아니라 서로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노동교실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는다.
역사는 사건을 기록하지만, 예술은 늘 그 시간 속,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혁래·김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은 1970년대 청춘의 한 시절을 부당함과 맞서 싸웠던 여성들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온다. 1977년 9월 9일. 역사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시간과 그속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숨결과 그 여리고 아팠던 기억을 현재로 불러온다. 그리고 그들의 값진 삶을 기억하고 작지만 소중한 마음을 위로한다.
다큐멘터리는 ‘청계피복노동조합 투쟁사’의 마지막 한 줄로 기록된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9·9 투쟁. 이소선 석방과 노동교실 반환을 요구하며 결사투쟁. 민종덕 투신, 신승철·박해창 할복 기도, 전순옥·임미경 투신 기도.’ 이 한 줄에 담긴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기억과 그 삶의 조각들을 풀어 내려놓고 한땀 한땀 손바느질하듯 깁는다.
극악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비판이나 객관적 지표 속에서 희생된 여성이라는 표지 대신, 배움이라는 꿈과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뜨겁게 산 여성들의 표정과 생생한 목소리를 포착한다. 그들이 직접 작성한 일기, 편지, 그리고 그 시절의 사진 위로 생생한 증언을 입혀 뜨겁고 아팠던 여성 노동자의 시간을 화면 위에 수놓는다.

볕이 된 그녀들의 시간

극적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혁래·김정영 감독은 부산 떨지 않는다. 충분히 과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신파적 감수성을 털어내고 오직 그 시간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일에 집중한다. 그래서 <미싱타는 여자들>은 선동이 아닌 공감을 주는 이야기가 된다.
아픈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에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깊이 박혀 있는 것 같다. 팍팍한 현실에서도 서로의 처지를 보듬어주는, 조금 더 따뜻한 연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위로 그들이 부당함에 맞서지 않았다면 변화된 우리의 내일도 없었을 거라는 후배들의 존경과 존중의 시선을 꾹꾹 눌러 담는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노동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모독의 시간을 견뎌온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그리고 노동의 효율보다 인간이라는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게 만든다. 그렇게 존엄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이야기는 보는 이들에게 멍 같은 죄의식을 남긴다.
다큐멘터리 속 ‘미싱타는 여자들’은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세상이 주저앉힌 자리에서 달아나지 않고, 시절이 부정한 ‘나’를 긍정하려는 힘, 그 가치에 대해서 묵묵하게 이야기한다. 40년의 시간이 지난 후 재회한 젊은 시절의 그녀와 만난 오늘의 당신들은 그래도 참 잘 살았다며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 빛이 되는 그 벅찬 순간은 우리에게도 볕처럼 따뜻한 위안을 준다.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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