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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

형식을 강조한 예술교육 커리큘럼이 꼭 필요한가 예술교육의 기능 성찰

예술의 행위 주체인 예술가가 교육에 다가설 때 관성처럼 예술교육 커리큘럼이 요구된다.
교육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형식에 갇힐 때 예술성은 강제로 휘발된다.
경쟁의 미화가 관습처럼 느껴지는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상당하다.
예술교육 커리큘럼으로 지원 사업에서 경쟁하면서 예술교육은 기능을 잃고 있다.

예술교육의 대량생산 공정

근대 이전의 교육은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비공식 교육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별한 기준을 정하기보다는 삶의 지혜나 생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전하는 것이 주된 목적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 공동체에서 교육은 생존 법칙을 다음 세대로 전수하는 기능을 갖는다.
체계를 갖춘 교육이 없지는 않았다. 문자를 읽고 쓰기부터, 철학서와 경전을 통해 지식을 배우는 순서와 당대 사회의 지향을 담은 교육이 있었다. 다만 모두가 교육을 받지 못하고 특정 계급만 그것을 누리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가정과 지역 공동체는 학교 또는 공공의 제도에 누구나 교육하고 교육받을 권리를 넘겼다. 이로써 보편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교육은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라는 판단이 공교육 또는 근대 이후 학교교육으로 옮겨 온다. 다시 말하면 먹고사는 기술을 가르치던 가정과 지역사회의 교육 기능이 학교로 옮겨 가면서 학교의 위상과 권위가 높아졌다. 학교가 한 개인을 먹고살게 해준다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정리하자면 결국 교육 내용이 대량생산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최대의 효율을 뿜어내기 위해서 학교는 건물이 되고, 교육 내용을 체계화한 커리큘럼과 그 내용을 전달하는 교사가 필요해졌다. 이 구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구조에 예술과 예술교육을 대입하면서 생긴다. (이 글에서 공교육 체계에 포함된 예술교육을 거론하진 않는다. 자칫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도 하거니와, 다양한 대안이 학교에서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을 매기는 보통의 공교육에 예술을 대입해 보자. 예술은 예술가의 행위라고 좁혀서 설명할 수 있다. 더구나 예술가는 창작 과정에서 배운다. 창작과 창작품의 완성도는 정의하기 어렵고 기준을 말하기 쉽지 않다. 즉 학교교육 또는 공교육에서 행하는 달성 가능한 목표에 대응하는 방법과 다르게 예술교육은 주관에 의존한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의 안목이 작용한다고 표현해도 무리는 아니다. 사회교육으로서 예술교육이 공공성을 기초로 공공기관 중심으로 실행되다 보니 학교교육의 형식을 차용(이라고 쓰고 흉내라고 읽고 싶다)하고 있다. 예술가가 교육으로 작업 범위를 확장할 때 당연한 듯 공공연히 예술교육의 커리큘럼이 요구된다. 그리고 또 커리큘럼에는 예술가의 작업보다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어디까지 달성할지 당연한 듯 목표를 기술한다. 자연스럽게(?) 공적 영역의 예술교육 장면에서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예술교육을 바라보게 한다. 창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예술의 영감과 동기는 계량화하기 힘들고, 여간해서는 단어와 문장이 담긴 문서로 정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가진 예술교육은 예술가의 작업에서 확장하는 것이 아닌 대량생산 구조 안에서 시들어간다.

서울예술교육센터 <아츠포틴즈> VR드로잉 워크숍 ‘2001/2023: 스페이스 오딧세이’

서울예술교육센터 <아츠포틴즈> 도구 워크숍 ‘공소(工所)’

예술교육 커리큘럼은 예술가의 창작이어야 한다

경험재인 예술은 오랜 시간을 통해 전수되고 계승된다. 이는 예술가의 경험 순환을 의미한다. 사회에는 수많은 예술가가 살고,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때로는 개인이기도, 협업을 강조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이유는 작품을 창작하는 데 수단으로 작동한다. 작품 또는 작업 방식을 경험한 개인과 집단은 그 과정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이 욕구에 부응하려는 의지를 가진 예술가가 있을 때 예술교육이 시작된다. 이때 시간을 써야 하고 비용이 발생한다. 예술가를 만나기 위해서 넘어야 할 허들이다. 필요하다면 도구를 구비하고, 예술가를 찾아야 하고, 요구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예술교육이 공공의 영역으로 자리하는 이유는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 제안이라 볼 수 있다.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와 사업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한 나라가 하는 일이며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사업을 풀어내는 방식을 정한다. 여기까지는 매우 합리적 선택이며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본격 사업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위에서 언급한 방법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술교육을 실행할 예술가 개인 혹은 단체에게 재원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배분과 배포의 공정성이 화두가 되고, 그 기준으로 예술교육이 무엇을 달성하는지 실효성을 증명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예술교육을 지향하며 사는 예술가가 꾸준히 늘어났다. 이들은 자기 예술 세계와 창작 과정을 통해 예술 경험을 전수하려 노력한다. 예술가로서 알게 된 탐미성을 작품으로 설득하고 싶고, 완성과 실패에서 느끼게 되는 통쾌한 감정을 나누고 싶다. 하지만 지원 사업 등에 접속하는 순간 모든 언어가 평평해진다. 1차…2차…로 묘사하고, 도입과 전개를 거론하며, 매시간 계획과 기대효과를 쓴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단어의 조합으로는 지원 사업 심의에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극적 코드를 설정하거나 번듯한 결과가 예측되도록 써야 한다.
커리큘럼 자체는 필요하나, 형식을 따라야만 하는 틀이 문제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공공기관은 채워 넣어야 하는 빈칸이 가득한 기획서 양식을 준다. 예술가가 아니라 행정가의 편의에 맞춰야 한다. 교육 기획, 특히 예술교육의 기획은 예술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술가에게 자신의 포트폴리오나 작품을 설명해 달라고 할 때 볼 수 있는 재현 방식과 태도는 사라진다. 이미 이 형식에 갇혀 있기 때문에 다른 상상을 하기 힘들 정도다. 간혹 기획서 양식이나 RFPRequest for Proposal, 제안 요청서 없이 사업이 실행되는, 자율성이 강조되는 사업을 하면 예술가와 교육예술가들은 정해진 틀이 왜 없는지 묻거나, 진짜 없는지 재차 확인한다. 예술교육의 커리큘럼에서 창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면 우리가 예술교육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할 시간이 됐다.

조인호서울예술교육센터 A14s 디렉터 | 사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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