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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2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27동업자끼리 공장이라고 말하는 작업실을 가졌다

수유역 3번 출구

1990년대 중반, 강북구청이 있는 수유 사거리는 강북권의 번화가였다. 의정부·고양·포천 등으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도 지하철역 가까이에 있었고, 커다란 종합병원도 근처 길가에 있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먹고 마시는 것으론 없는 게 없는 먹자골목. 실컷 먹고 마신 뒤 일상을 던져버린 일탈의 해방감에 젖은 채, 헤어짐이 아쉽고 싫은 사람들. 그러고도 미진한 흥을 풀자고 우르르 몰려 들어갈 수 있는 노래방과 카바레와 나이트클럽에 여관, 호텔도 존재를 알리느라 네온 간판을 깜빡이고 있었다. 무법천지의 기운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시간은 거의 자정을 훌쩍 넘겨서야 마지못한 듯 잦아들었다.
1985년 4호선이 개통되고 몇 차례 연장되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변해갔다. 모든 지하철 정거장엔 그곳으로부터 좀 떨어진 마을까지 주민들을 실어 나르는 마을버스가 있었다. 시내를 오갈 때 이용하는 지하철이 개통 열 돌쯤 지났을 무렵, 동업자들이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 사용하는 작은 방을 ‘공장’이라고 부르는데, 나도 공장을 한 칸 마련했다. 바로 그 번화가의 중심, 지하철역사와 연결된 빌딩으로. 그맘땐 근처에서 가장 높았다.
공간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집에 있어도 글을 쓸 수 있는데 가족이나 가정으로부터 걸어서 한 시간 남짓, 차로는 10분이 채 안 걸리는 곳으로 나오자 경험하지 못한 해방감과 독립감이 내면에서 살아났다. 책들을 옮기고 옷가지들도 가져다 놓고 끼니를 해 먹을 수 있는 간단한 그릇들이나 밥솥에 자그마한 냉장고도 들여놓았다. 그냥 이곳에서 평생 혼자 살아도 되겠다 싶으면 거의 황홀한 기분에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고백하기 창피한 것이 있는데 결혼 이후, 나는 늘 소설 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시달리는 편이었다. 가정을 가지기 전부터 직업작가였는데 결혼이란 제도로 들어가자 새로운 역할이 마구 생겼다. 작가로서의 내 일을 하자면 가족과 가정으로부터, 더 넓게는 대가족으로부터 몰래몰래 시간을 훔쳐 쓰는 것 같았다. 심지어 작가로서 번 돈의 상당한 부분이 집안 살림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이건 나만의 경우에 해당하는 걸까? 나는 기질적으로 비굴한가? 잘 살펴보면 이유가 아주 없지는 않다. 첫째, 소설가 며느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가부장의 선언이 있었고, 몇 년이 지난 뒤, 아이를 낳은 후에, ‘소설이냐, 결혼생활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경고를 듣게 되는 사건도 겪어야 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비굴해졌을까? 대략 이때로부터 스물 몇 해가 흐른 뒤에 그런 조건들과 결별하게 됐다. 그 첫날 밤, 다소 휑한 방 안이었지만 혼자 누워 ‘아, 이제 나는 소설과 결혼했다’란 각성이 싱그럽게 밀려들던 기억이 난다. 그 개운함이라니! 따뜻한 기운으로 감돌던 자존감. 나를 사랑하는 느낌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이랬다. 아침에 반찬을 싸 들고 집에서 나오면 수유역 가는 마을버스가 있었지만 거의 택시를 탔다. 마음이 급했던 것 같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공장에 가고 싶어서. 내가 나 혼자로서 있을 수 있는 그곳으로. 역에서 내려 승강기를 타고 12층으로 올라가서 열쇠로 문을 열면 방 안의 모든 것이 나의 모습으로, 나의 기운으로 반겼다. 내가 존중해 마지않는 평화(平和)였다. 이 벅찬 기운과 만나려고 촌각을 다퉈 이곳으로 왔다. 어제 쓰다 만 소설의 장면들, 그리고 오늘 이어갈 장면들이 샘솟았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음악을 틀었다. 이즈음 쓰는 소설의 주제가 같은 것이었다. 신문에 연애소설을 쓰고 있었으므로 감정이 애절해야 했다. 애절하기론 브람스나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걸맞은 편이었다. 그리고 하루에 쓸 만큼 만족스럽게 썼을 때, 혼신을 다해 몸이 더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 닿았을 때, 세속의 모든 때가 벗겨졌을 때, 그래서 투명한 해방감으로 자유로울 때 베토벤의 9번 교향곡 3악장을 들었다. 이걸 듣고 싶어진다는 건 오늘 쓴 글이 만족스럽다는 의미였다. 침대에 군드러져서 음악을 듣고 또다시 되풀이해 들어야겠지만 공장문을 닫고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아주 만족스럽게 썼다고 생각했던 어떤 문장, 묘사 등에 문제가 있다는 게 깨달아진다. 지친 몸이 더 처지지만 깨달은 것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집으로 가는 여러 골목을 걷는다. 어떤 날은 가는 길에 삼계탕을 잘하는 식당 살구나무집에 들른다. 주인은 간(肝)이 탄 듯이 새카매진 내 얼굴을 보고 이미 다 안다. 탁자 옆에 눕다시피 구부리고 있다가 삼계탕을 먹는다. 삼계탕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몸이 조금씩 기력을 되찾는 게 느껴진다. 계산할 때, “얼굴색이 돌아왔다”고 주인이 말한다. 기운을 차리고 집으로 가는데 또다시 떠오르는 생각. 삼계탕 한 그릇이 내 소설책 한 권 값과 맞먹는다는 사실. 누군가 책을 한 권 산다는 건 삼계탕 한 그릇을 포기한다는 것. 그렇다면 내 소설은 독자에게 삼계탕 값을 하나? 이 단순한 의문은 나를 조금 성장시켰다고 생각한다.
이후 ‘소설로서의 기능을 다 했나’ 같은 검열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이후의 글이 그런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하려 애쓰고 애쓰는 중이다.
글·사진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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