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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현재라는 수평



<쓰다> 7호 포스터



<쓰다> 8호 포스터

지난여름, 지지난 여름을 유난히 그리워하게 되는 여름이다. 올해 여름휴가를 받고 보니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작년, 재작년 나는 제대로 된 피서를 떠나지 못했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집에서 보내는 느긋한 시간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언제고 마음만 먹는다면 바다로든 산으로든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비행기 타는 게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여튼 요즘 나는 지나간 여름들을 떠올리고 있지만,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어떤 장소는 아니다. 어떤 기분도 아니다. 물론 지지난 겨울, 반나절 일정으로 들렀던 바다가 보이는 작은 서점에 다시 가보고 싶긴 하다. 그곳의 여름을 느끼며, 여름 서점에 오니 이런 기분이 드는구나, 생각하고 싶다. 그럼에도 내가 끊임없이 돌이켜보는 순간은 작년, 재작년 여름의 어떤 상태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무엇도 포기되지 않았던 날들. 그저 평온하던 그 시절에 내 자유의 한 조각을 떼어주고 떠나온 것만 같다.
2018년 7월호를 들춰보았다. 〈핀, 핀, 핀〉이 불러오는 건강한 기운이 기분 전환에 도움을 주었다. 볼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힘차게 굴러간 공이 열 개의 핀을 깨부수듯 쓰러뜨리는 순간의 쾌감이 여름에 잘 어울린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작년에 써놓은 것이 컴퓨터 어딘가에 있긴 했다. 무엇 하나 추가할 항목이 없어 당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이력서였다. 게임이나 계속해. 나는 다 마신 맥주 캔을 구겼다. 스터디에서 서른한 살짜리 형이 새로 들어왔는데 이력서를 돌려 봤거든. 그런 것도 하냐. 나는 구겨진 맥주 캔을 더욱 작게 구겼다. 아무것도 없는 거야. 인턴도 없어, 봉사활동도 없어. 토익이나 학점도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있는 게 나이밖에 없어. 나이밖에 없어서 해줄 말이 없어. 민제가 맥주 캔에 소주를 부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한신아, 〈핀, 핀, 핀〉 부분

주인공은 지방대학의 졸업반 학생이다. 그는 친구 민제, 규태와 ‘썬더 볼링즈’라는 이름의 볼링동아리를 함께한다. 그들은 동아리를 핑계로 모여 술을 마시며 볼링을 즐기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이 작은 동아리와 볼링이라는 스포츠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볼링은 셋을 모이게 하고 그들이 서로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어느 날 볼링을 그만두겠다며 민제가 꺼낸 취업 스터디 이야기에 세 사람은 잠시 말문을 닫는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취업이라는 현실의 문제에 자아실현이니 꿈이니 하는 이야기는 끼어들지 못한다. 누군가 취업을 계획한다면 그는 부지런히 이력을 쌓아야 한다. 그는 자기 매력을 몇 줄의 문장이나 몇 개의 숫자로 보여줘야 한다. 어쩌면 취업이란 지금 그들이 술 마시며 즐기고 있는 저 대낮의 볼링과 가장 동떨어져 있는 무엇일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무엇도 포기되지 않았던 날들이 끝나간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볼링선수였다. 데뷔전에서 그는 오직 ‘스트레이트 볼’ 하나로 승리를 거머쥐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그날의 그 순간. 어쩌면 주인공의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그날의 그 장면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어느 날 주인공은 트로피를 닦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그가 ‘다른 시대’ 혹은 ‘다른 세계’를 산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에겐 인생 최고의 순간이란 그의 초라한 현재를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겐 인생 최고의 순간이란 남은 인생을 걸고 다시 쟁취하고픈 미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인생 최고의 순간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종종 꺼내 보는 트로피처럼 좋은 시절을 잘 모셔두고 있다. 볼링공과 트로피를 닦듯이 거기에 먼지가 내려앉지 않도록.
2018년 8월호에 신두호 시인은 이런 문장을 적었다.

주어져 있는 것은/다만 남겨진 것/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것은/아무것도 아니었으니//약속한 시간이/정해진 장소와/달라졌다고 해도//겹겹의 조각을 포개며/종이를 모으던 손과/어긋나게 되었다고 해도//유리잔 안의 물이/진동을 감지하듯/수평만을 유지하게 되니까/일어나지 않는 일들만이/밤새도록 그것을/ 들여다보게 하니까/
신두호, 〈물의 곁〉 부분

시의 제목에서 이미지를 빌리자면, 흔들리는 수면은 수평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곁을 나누고 또 나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의 문법을 따르자면, 어쩌면 주인공이 감지하는 불안한 미래와 아버지가 끝없이 돌아보는 과거 사이에서도 현재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수평’을 맞추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핀, 핀, 핀〉은 주인공이 아까 못 넘어뜨린 나머지 세 개의 볼링핀을 향해 스트레이트 볼을 힘껏 굴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나는 그가 멋지게 스페어를 처리했으리라 믿으며 소설 읽기를 마쳤다. 그를 포함하여 세 친구의 일상이 수평을 맞추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글 김잔디_웹진 [비유] 편집자
사진 제공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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