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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8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9위무(慰撫)의 등대를 찾아 보문동으로 갔다

1979년 보문동, 박완서 선생님과 따님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소설과 관련한 수업을 부업으로 한 지 꽤 오래됐다. 올해도 봄철에 짧은 수업을 했는데 어떤 수강생 한 분이 내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서 읽어줬다. 내용은 당신이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자신만만’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딱히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긴 했다. 나는 늘 내가 비굴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지구탈출을 꿈꾸며 산다고 생각하는데 자신만만하다니! 어쩌면 ‘꼴값’이 대단하다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나는 절망과 두려움이 내 인생이란 얼굴에서 지금까지 내내 사라지지 않았던 표정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삶이란 것을 이해하고 아끼게 되기 전까진 그랬다.
그 이전엔 왜 그랬을까? 어렵지 않게 대답을 찾았다. 총체적 가난에 매몰되어서였다. 부자 팔자(八字)는 아니어도 기본적인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도록 타고나서 먹고사는 걸 꾸러 다니진 않았다. 그러나 정신은 한없이 가난하고 비루하기까지 했다. 어릴 때부터 희망도 소설, 딱 한 가지밖에 가지지 못해 그것 아니면 달리 없어서 곧장 절망과 좌절의 낭떠러지에 서야 했다. 희망과 절망의 회오리는 소위 꿈이란 것을 이룬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럴 때 내가 살아남기 위해 가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무(慰撫)의 등대가 있었다. 보문동이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걷고 또 걸어서 가야 했다.
작은 네모꼴 마당이 있는 집. 한옥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문간방과 왼편과 맞은편에 방이 있으니 디귿자집이었다. 왼편과 오른편에 잇닿은 방 앞엔 툇마루가 있었다. 다섯 남매를 낳아 기르고 시어머님을 모시고 작은 기업을 경영하는 남편과 살던 소설가 박완서. 바로 그를 등대 삼아 찾아가곤 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의 가난한 마음을, 의지가지없는 청춘을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누군가의 등대가 된다는 건 부담스럽고 심지어 귀찮은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박완서와 나의 정신적 교직(交織)의 비밀을 슬픔의 울음으로 느낀다. 선생님은 거의 천재에 가까웠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천엽 같은 사람의 속은 물론, 세상에 대해서도 투시하듯 느끼고 판단했다. 그러니 나의 촌스런 본성에 대한 이해와 연민에도 섬세하고 날카롭고 따뜻했다. 그는 내 슬픔을 공유해줬고 내 분노에 공감해줬다.
인연의 시작은 이랬다. 등단하던 해 아주 화창한 봄날, 소설가들끼리만 단합대회를 하러 야외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행사가 끝나고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끼리끼리 모여 있었다. 그때 같은 원탁에 앉았던 분 중에서 한 분이 내가 등단 후에 발표한 단편소설 <복수>를 칭찬해줬다. 그 칭찬이 내 영혼을 먹어버렸다. 아니다. 내 영혼이 그 칭찬을 삼키고 뱉지 못했다. 기쁘고 아까워서였다.
그해에 그렇게 만난 우리. 우리라는 표현은 썩 어울리지 않는다. 대개 내가 매달리는 형국이었으니. 위로와 격려를 다급하게 필요로 하는 편은 언제나 나였으니까. 그분만큼 나를 이해하고 들여다보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주 오래전, 결혼할 거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한마디 하셨다.
“세상이 조금 보이세요?”
그 순간 내면에서 뭉클거리던 뜨거운 부끄러움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사랑은 따뜻하고 포근하고 감미로운 것만은 아니다. 태풍처럼, 해일처럼 뒤흔들어 낡은 것을 떨어뜨리고 속을 뒤집어 대청소를 시키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선생님은 내게 작거나 커다란 사랑을 베풀고 가신 분이다.
그는 자신의 친절이 받는 사람에게 부담으로 남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그를 처음 찾아갔던 보문동, 그리고 강남의 아파트들, 마지막으로 구리시의 아치울 집. 마당에 백 가지도 넘는 꽃과 나무들을 기르고 흙과 생명의 교감에 당신도 끼어들던 노년의 시간들.
그가 떠나기 여러 해 전, 뜰에서 재미있는 술자리도 마련했었다. 그를 좋아하는 후배들을 불러서 허물없이 지낸 시간이었다.
“와인을 마시며 즐겁게 놀았던 게 가장 남아…….”
부축을 받아야 했던 그의 마지막 시간 어느 날, 내게 했던 말이다. 명예와 부와 권력보다 더 소중한 것은 무구(無垢)한 즐거움이라는 것. 그리고 세배를 드리고 일어선 후배 둘을 바라보던 그 시선. 저것들이 나 없이도 살아남아야 할 텐데…… 그런 걱정과 연민과 염려가 가득하던 그 시선. 선생님이 가신 뒤에 한 가지 깨달았다. 어린 사람은 어른들에게 잘할 수가 없다고. 자연의 이치란 생각이 든다. 자식이 어버이의 은혜를 갚을 수 없듯이.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사진 제공 호원숙_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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