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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7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8석관동에서 만나 이문동을 지나 쌍문동에서 작별하다

지난 2월 23일, 게으른 느낌의 토요일 아침이었다. 아침 준비를 하려고 일어나서 전화기부터 열어보았더니 문자가 한 통 들어와 있었다. 발신인이 ‘김금화 선생님’이었다.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들춰 보니 임종이니 장례식장이니 하는 단어가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그러면서 발신된 번호를 눌렀다. 선생님의 조카가 전화를 받았다. 뭐야? 선생님이 돌아가셨단 거야? 내가 물었더니 눈물에 푹 젖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전날 오후에 갑자기 위험해져서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새벽에 임종하셨다고 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거였다.
김금화(金錦花). 무당이다. 세상 사람이 다 천하게 여기는 직업 무당. 무당이기 때문에 당신은 자신을 천하게 두지 않으려고 평생 긴장하며 살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들 앞에서 앉은 자세나 선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정신의 맑음을 지키려고 천지신명에 대한 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옷매무새는 단정하고 얼굴은 곱고 머리도 중년 이후엔 늘 쪽을 찌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석관동의 주택가였다. 처음엔 틀림없이 벌판이거나 논밭이었을 땅에다가 집장사가 똑같은 도면으로 지어서 팔았을, 다닥다닥 붙은 단층집들 중의 하나였다. 대문에 슬래브 지붕을 만들어 거기에 당장 쓰지 않는 시루나 알루미늄 쟁반과 대나무 채반들을 화분과 함께 놓았었다. 그는 굿을 하고 점을 봐주는 무당인데 처음 만난 이후 올해 2월 4일 입춘(立春) 날까지 서로 아끼고 그리워하고 위로를 주고받으며 살았다. 그런 그가 지구를 떠난 것이었다.
석관동에서 이름을 날리며 돈을 모아 안기부 담장이 가깝게 보이는 언덕바지에 2층 집을 장만해 옮겼다.
아래층엔 식구들과 제자들이 지내고, 위층엔 신당을 내고 그 옆방에서 기거했다. 신당에는 그가 모시는 신들의 형상을 그린 마지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고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며 촛불과 정화수가 놓여 있었다. 내가 그 신당에서 평안을 느끼는 데 30년도 더 걸렸다. 그 세월 동안 조금만 불안하거나 서러움이 들끓는 일이 생기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거나 전화로 하소연해서 선생님을 귀찮게 해드렸다. 염치없음이 파렴치 수준이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나이 들어 욕심이 가라앉게 되면서 선생님을 찾는 일이 뜸해졌다. 요즈음 들어서는 일 년에 한두 번 전화로 목소리를 듣거나 그랬다. 심지어 입춘 날이 되어도 선생님 댁에 잘 가지 않았다. 무당과 단골 관계를 잇고 사는 사람들은 입춘맞이를 하러 가서 한 해의 운수를 점치고 액은 물리고 복은 받는 작은 치성을 드린다. 내가 그 행사에 소홀해진 건 당장 알고 싶은 액운이나 행운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자주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시는 일이 잦기도 했다. 지난 2월 4일 입춘 날, 전화를 해서 입춘 행사를 하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병원에 계시고 제자들이 다른 해처럼 행사를 한다고 했다. 선생님 댁 이문동 집은 재개발에 들어가서 한두 달 전에 월곡역 근처로 전세를 들었다는 곳으로 갔다. 그동안 오래 보아서 정이 든 제자 셋이 단골들을 맞아 치성을 드려줬다. 어떤 화가가 정성으로 그려준 선생님의 초상화, 세계 곳곳을 다니며 행사 굿을 했던 사진들이 집 안 곳곳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한적하고 심지어 쓸쓸한 기미마저 감돌았다. 내색하지 않고 그곳에서 나와 병원으로 갔다. 쌍문동 한전병원이었다. 간병인의 보호를 받고 계시던 선생님이 나를 알아보고는 속울음을 우시는 것 같았다. 내 마음도 그랬다. 어느 제자가 아마 한두 해밖에 못 사실 것 같다고 그랬었다. 한두 해가 어디냐.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선생님은 입안이 헐어서 말씀을 잘 못하셨다. 선생님의 창백한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었다. 전화기의 사진을 보여드렸다. 선생님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나는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의 삶이 갈피갈피, 켜켜이 느껴졌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울면 선생님을 영영 못 볼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선생님이 자꾸 그만 가라고 손짓하고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왜 가라고 하느냐, 더 있고 싶다고 말했더니 선생님이 어눌한 발음으로 “바빠!” 하셨다. 간병인은 선생님이 이제 회복하셨다고 그랬다. 안심을 하고 병실을 나왔다. 하루 이틀 사이에 다시 오리라 마음먹었다.
인간문화재 무당 김금화. 두 해 전 만수대탁굿을 할 때 걸음걸이가 어려워 제자들의 부축을 받았었다. 그런데 작두거리를 할 때, 누가 당신 대신 작두날에 오를까를 제자들이 의논하자 당신이 맨발로 훌쩍 작두날에 올랐다. 다리가 불편했다는 건 거짓말 같았다.
그 김금화. 이 시대와 사회에 죄 한 번 지은 바 없으되 학대와 멸시와 차별의 벌판을 걷고 걸어서 2월 23일 새벽, 우주로 돌아갔다. 차별과 위협이 없는 곳에 계시리라 믿는다. 이제 이 지구에선 그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하게 혼신을 다해서 천지신명께 몸을 굽힐 무당은 오지 않을 것이다.

글·사진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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