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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7월호

봉준호 감독수평과 수직계급, 그 십자선 긋기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가 현상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기생충>은 다 계획이 있었다. 개봉일을 칸 영화제 이후로 미루고, 황금종려상이라는 산수경석을 수면 위로 떠올렸다. <기생충>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훨씬 즉시적이고 열광적인 현상 속에 있다. 영화를 봤는지가 안부인사가 되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대화가 된다. 관객들은 켜켜이 쌓아둔 은유와 상징을 찾아내는 해설 놀이에 빠진 것 같다. 때마침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2019년에 이 수상과 현상은 ‘참으로 시의적절’해 보인다.

영화 <기생충>.

지하 인간의 원형, <플란다스의 개>

2000년 어느 날, 텅 빈 극장에서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보고 멍했던 기억이 난다. 강아지 실종 사건을 둘러싼 서민 아파트 주민들의 소동을 그린 이 영화는 지독한 농담 같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였다. 낄낄대고 웃다가 대체 내가 왜 웃고 있는지 반문하게 만든다. 유쾌한 웃음이 아니라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봉준호의 세계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19년 전 봉준호 감독은 세상이 어차피 불공정하다는 전제를 두고, 사람들의 무기력증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영화는 비정규직과 독거노인, 부랑자, 학계의 적폐와 피곤한 사람들의 삶을 고루 바라보지만,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비루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만, 누구도 악인은 아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기생충>의 지하 인간의 원형이 이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서민들의 아파트 지하에는 그보다 더 낮은 계층의 사람이 숨어 살고 있다는 설정이다. <플란다스의 개> 속 반려견 실종사건은 떠들썩하다. 일상이 뒤흔들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반려견의 실종에 슬퍼하던 아이는 새 강아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독거노인의 죽음은 무말랭이 이외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이 속한, 소시민의 그 자리로 돌아간다. 그나마 비리를 통해 기득권이 되는 방식을 택한 윤주만이 달콤한 미소를 짓는다.

계급과 선 긋기, <설국열차>

극명한 계급사회에서 기생 혹은 공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설국열차>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멸종하고 1년에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이 열차 속 인간관계는 철저한 계급 구조 속에서 유지된다. 가장 하층 계급은 좁고 더러운 꼬리 칸에서 살아가고 있다. 상류층은 열차의 앞 칸에서 기득권의 여유를 누린다.
생존자들이 탑승한 열차는 이미 극명화된 계급사회의 축소판이다.
<기생충>이 가장 높은 곳의 부잣집과 가장 낮은 곳의 반지하를 수직으로 나눴다면, <설국열차>는 계급을 수평으로 나열했다. 마치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클래스의 승객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는 것과 같은 구조다. 이 무국적 혹은 다국적 영화를 통해 수많은 인종들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한국이라는 지극히 국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비틀린 유머와 정서가 파고들 틈은 없어 보인다.
봉준호 감독은 계급이라는 이야기가 한국이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설득 가능한 소재라는 사실을 <설국열차>를 통해 발견, 혹은 확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혁명과 그 실현이라는 전복적인 판타지 대신, 폐쇄된 공간에서 발현되는 정서의 흐름과 결국 어떤 노력도 이 사회의 계층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리란 인지 사이에서 분명한 선 긋기를 시작한다.
이미 틀에 짜인 정치, 사회적 시스템 혹은 맞서 싸워야 하는 거대권력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늘 치열한 사투라는 씁쓸한 현실에 더해, 어떻게 해도 이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선언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불편한 비판 대신 보편적 정서라는 대중성에 더 가까워졌다고도 볼 수 있다.
<기생충>은 불편한 계급 갈등 대신, 감정을 학대하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계급이 갖춰야 할 예의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는 인디언 놀이를 하는 다송이라는 아이가 나오는데, 이 아이의 캐릭터가 흥미롭다. 예술적 재능이 있는지, 예술적 재능이 있는 척 하는지 알 수 없는 다송은 지하 인간을 목격하고, 해고된 가사 도우미와도 연락하며, 가난한 자들의 모스 부호를 읽을 줄 알지만 해독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는다. 다송은 삶의 진창에 발을 담그기보다는 한발 떨어져 현상을 관찰하려는 예술가와 닮아 보인다. 인디언 흉내를 내지만, 굳이 인디언 자체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예술가가 바라보는 우리 시대의 동시대성은 홍수가 난 날 돼지와 함께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다리 위에서 떠내려가는 돼지를 바라보는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글 최재훈_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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