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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그래픽 디자이너 겸 웹툰 작가 조경규의 명보 사거리와 인쇄 골목행복한 오감의 기억
하루가 다르게 새 건물과 새 가게가 들어서는 홍대 주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지만, 서울의 구시가를 더 좋아한다는 조경규 작가. 그중에서도 을지로와 충무로의 인쇄 골목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소중한 동네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을지로3가역의 8번 출구다.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왼편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동경우동 집이 사람들을 반기고 앞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명보극장이 있던 큰 사거리가 나오는, 그 동네를 소개한다.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1 2008년의 마지막 날, 서울 중구 명보극장 앞 사거리.

극장과 함께 기억하는 인생 영화들

독서실에 공부하러 간다고 집을 나와 영화 보러 시내의 극장들을 내방처럼 드나들던 고등학생 시절, 그러니까 1990년대 초반의 얘기를 잠시 해볼까? 어느 극장을 가나 다 똑같은 영화를 여러 편씩 상영하는 지금의 멀티플렉스가 자리 잡기 전에는 특정 극장에 가야만 그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가령 <늑대와 춤을>은 대한극장에서만 상영하고, <분노의 역류>는 피카디리에서만, <장군의 아들>은 단성사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보았던 특정 영화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그 극장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도 <가위손>을 볼 때면 당시 아세아극장의 거대한 양철 간판과 눅눅한 담배 냄새가 생각나고, <터미네이터 2>와 <첩혈쌍웅>을 얘기하노라면 서울극장의 으리으 리한 3관 시설에 놀랐던 기억이 떠오르는 식이다.
내게 명보극장은 샘 레이미의 <이블데드 3>와 이명세의 <첫사랑>, 그리고 장 자크 아노의 <연인>이다. 특히 과다한 노출 신으로 세간의 화제였던 <연인>을 당시 미성년이었던 내가 약간의 변장과 연기력으로 무사히 표를 사 담배 피우는 중년 아저씨들 틈에서 본 것은 큰 기쁨이었다. 그 후 명보극장은 멀티플렉스로 변신을 꾀했고 <매트릭스 3>를 그곳에서 보았지만 영화도 극장도 기억에서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2 ‘동경우동’의 따끈한 우동.
3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인쇄 골목 풍경.

초보 디자이너의 성장 터

명보극장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본격적인 인쇄 골목이다. 인쇄용 종이를 가득 싣고 세 개의 바퀴로 굴러가는 오토바이,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작은 인쇄소들의 커다란 기계들과 기름 냄새! 을지로의 극장만 다니던 내게 한 블록 너머 이런 곳이 있다는 걸 가르쳐준 사람은 1997년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강미나 대리님이었다. 인터넷 방송과 홈페이지 제작을 하던 회사로, 입사한 지 일주일쯤 후 내 명함을 만들러 같이 을지로를 찾았다. 종이집에서 명함종이를 구입하고 골목 건너 마스터 인쇄집에서 명함을 인쇄하고 다시 건너편 후가공 집에서 타공을 하고 박을 찍었다. 국2절, 도무송, 중철, 오시, 하리꼬미, 오리꼬미, CTP, 싸발이, 하리돈땡 같은 듣도 보도 못한 글자가 적힌 간판들이 가득한 좁은 골목이었다. 듣자 하니 이곳에서 영화관 리플릿도 만들고 책도 만들고 교회 주보도 만들고 상품 카탈로그에 동사무소 소책자, 공연 포스터, 학원 전단, 나이트클럽 전단까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종이 인쇄물 중 안 만드는 게 없다더라. 완성된 내 생애 첫 명함을 받아들었던 그 골목 어딘가에서 강 대리님은 된장국이 딸려 나오는 생선구이 백반을 저녁으로 사줬다. 이곳에 오면 늘 먹는 거라면서. 먹을 땐 특별한 줄 몰랐는데, 먹고 나니 속도 마음도 편안하니 기분이 좋았다.
2002년부터 프리랜스 디자이너로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을지로 인쇄 골목을 돌아다녔다. 복잡하고 낯설었고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초보 디자이너가 딱 봐도 30년은 그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해왔을 인쇄기사 분들 앞에서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낯가림이 심하고 붙임성 없는 나였지만, 그래도 열심히 다니며 인쇄가 잘 나왔는지 확인하고 옆에서 물어보며 많은 걸 배웠다. 잘 나온 인쇄물을 퀵서비스로 업체에 보내기도 하고, 명함이나 스티커처럼 작은 건 직접 들고 오기도 했다.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기웃기웃하며 샘플도 얻고 여러 곳에 견적도 내보고 그랬다. 그러면서 무뚝뚝하던 기사님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음료수도 건네받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100% 과즙으로 말이다.

여전히 반기는 오랜 맛집들

먹는 얘기로 마무리를 해보자. 아까 언급했던 8번 출구 앞 동경우동은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규모로 따끈한 우동과 카레를 내오고 있다. 사거리를 지나 더 직진하다 오른편을 보면 진고개가 나온다. 오래된 한식집으로 양념게장과 갈비찜을 내는데, 혼자서 먹을 수 있는 갈비탕과 튀김정식도 맛있다. 다시 명보극장(현재는 명보아트홀)으로 돌아와 인쇄 골목인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풍전호텔까지 가면 오래된 닭곰탕집이 몇 있다. 거기서 중구청 방향으로 걸어가면 오장동 함흥냉면 골목까지 이르고, 충무로 방향으로 올라가면 길거리에서 생선을 굽는 백반집들도 만날 수 있다.
다행히도 이 동네는 큰 변화가 없다. 거리를 채운 작은 인쇄소들 간판과 그 안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 길거리를 오가는 오토바이들, 오랜 식당들이 여전히 나를 반긴다. 지금도 인쇄일로 그곳에 가게 되면 어떻게든 한 끼를 먹고 오려고 꼭 식사시간대에 가곤 한다.

글·사진 조경규_ 그래픽 디자이너 겸 웹툰 작가. 눈으로 먹는 웹툰 <오므라이스 잼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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