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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영화 <시인의 사랑>과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 예술가의 삶과 사랑의 도식
김양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시인의 사랑>과 토마스 만의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모두 소년과 사랑에 빠진 예술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전자가 사회적으로 용납받지 못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예술가와 세계의 충돌을 그린다면, 후자는 예술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성과 감성의 분투에 주목한다.

영화의 틈 관련 이미지1 영화 <시인의 사랑>의 한 장면.
2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3 토마스 만 단편선.

안온한 일상과 처절한 사랑의 기로에 서다

“예쁘기만 한 꽃, 그게 무슨 힘이 있나요.” 시인이 시인에게 말한다. 당신의 시어는 아름답지만 삶이 담겨 있지 않다고. 언젠가 삶의 아름다움과 비애를 담은 시를 쓸 수 있는 날이 올 때, 당신의 예술세계는 더 깊어질 거라고. 동료 시인의 말은 곧 이루어진다. 예쁜 시를 쓰던 시인은 사랑에 빠진다. 그건 일생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사랑이다. 모두가 반대하더라도,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라 하더라도, 기어코 이루고 싶은 사랑이다. 시인의 사랑이 그의 시를 변하게 한다. 이제 더 이상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다.
지난 9월 14일 개봉한 영화 <시인의 사랑> 이야기다. 김양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제주도에서 안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시인 택기(양익준 분)에게 찾아온 감정의 격랑을 조명한다. 그의 삶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연속이다. 동네를 산책하고, 친구를 만나고, 방과 후 수업으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밤이 되면 귀가해 아내(전혜진 분)와 밥을 먹는다. 어쩌면 마흔 살이 될 때까지 택기는 늘 이래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욕망이 없다.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할 수 있는 걸 다 할 수 있기에 당신을 사랑한다는 택기의 말에 그의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처절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야.”
그런 그에게 처절하고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생긴다. 마을 도넛가게에서 일하는 소년(정가람 분)이다. 소년은 함부로 아름답다. 소년은 외롭고 가난하다. 택기는 소년의 낡고 허름한 집에 찾아가 그를 돌봐주며 소년과 가까워진다. 그러던 도중 그의 마음속에는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감정이 생겨난다. 하지만 택기에게는 오랫동안 함께해온 아내가 있다. 소년과 그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도 부담스럽다. 시인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보호했던 일상의 모든 것들이 이제는 그를 옭아매는 족쇄가 된다. 처절한 사랑과 안온한 일상. 시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인다.
<시인의 사랑>이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이 순간부터다. 시인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일상에 머무는 쪽을 택한다. 그에게 사랑이란 에로스의 동의어가 아니라 보호한다는 감정에 가깝다. 사랑하는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고 할 수 있는 걸 다 이루었으면 하는 마음. 평생 아내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보호받으며 살아온 택기에게는 그것이 사랑이다. 소년이 택기의 바람대로 육지로 떠난 뒤, 집에 홀로 남은 택기는 <희망>(실제로는 기형도 시인이 쓴 작품이다.)이라는 시를 쓴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그렇게 치명적으로 위험하고 함부로 아름다웠던 감정들은 시 속에 머물 뿐이다.

예술가의 삶과 사랑이 주고받는 관계를 성찰하다

영화 <시인의 사랑>을 보며 생각나는 또 다른 작품이 있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이 작품은 1971년 이탈리아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가 연출한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한데, 당시 세계적인 미남배우 비요른 안데르센이 예술가가 사랑에 빠지는 완벽한 미모의 소년을 연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인공은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라 불리는 시인이다. 존경받는 시인인 그는 베니스를 여행하던 도중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를 만난다. “가장 고귀했던 시대의 그리스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그의 미모에 시인은 매혹되고, 소년의 주변을 맴돌며 그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토마스 만의 단편 중에서도 걸작으로 평가받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한 소년을 동경하고 사랑하게 된 시인의 변화를 통해 예술가의 삶과 사랑이 주고받는 관계를 예리하게 성찰한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소년을 사랑하지만 결코 그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데, 그건 그가 노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단련해온 이성이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열정과 갈망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시인의 사랑>이 세계와 예술가의 충돌을 그리고 있다면,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예술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성과 감성의 분투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토마스 만은 노년의 예술가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 격렬한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세상 사람들이 작품의 원천이나 작품의 생성 조건들은 모르고 단지 아름다운 작품만을 접하게 되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예술가에게 영감이 떠오르게 된 원천을 알게 되면 그들은 자주 혼란에 빠지거나 깜짝 놀라 훌륭한 작품의 효과가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시간들! 엄청나게 많은 신경을 소모하는 노력!” 하지만 토마스 만이 언급한 그 ‘이상한 시간들’에 대해 우리는 자꾸만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 대해. 열정에 사로잡히는 그 이상한 시간들에 대해.

글 장영엽_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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