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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명동 왕실다방 화려했던 그 시절의 명동, 그 기억을 간직하다
20세기 격동의 현대사를 보내며 서울의 중심지 명동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지만, 여전히 1950년대의 분위기를 간직한 공간이 있다. 명동의 ‘왕실다방’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을 전하는, 화려했던 시절의 명동을 느낄 수 있는 오래된 공간이다.

“일천구백 사십오년 팔월 십오일, 조국 광복 속에 명동 거리는 해방되었고,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명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름부터가 일정 때의 메이지마치가 아니고, 우리들의 옛 이름 그대로 명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 이곳에 오랜만에 처음으로 다방이 문을 열었다. ‘봉선화’라는 다방이었다. 기나긴 동안 어둠 속에서 코피맛도 잊어버리고, 음악과 다방분위기에 주리었던 사람들은 문 열기가 무섭게 ‘봉선화’ 다방의 손님이 되었다.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인 데다가, 마담 역시 지난날 이 거리에서 다방을 하던 사람이라 모두 서로가 반가웠다.”
_ 이봉구, 명동 20년, 1965. 8. 1, 조선일보 4면


1965년 8월 1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명동백작 이봉구의 ‘명동 20년’이라는 글의 서두 부분이다. 19세기 말 명동은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들이 각축을 벌이던 장이었는데, 1880년대에 이 땅을 차지한 것은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이었다. 서양인들은 1880년대 중후반 명동성당을 주변으로 성당과 학교, 병원 등을 만들며 자리를 잡았고, 중국인들은 현재의 중국대사관 주변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상대적으로 이 땅에 가장 늦게 나타난 것은 일본인들이었는데,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일본인들은 그들이 머무르던 진고개(현재의 남산동, 회현동) 일대를 벗어나 남대문로와 명동 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명동의 이름은 메이지마치(明治町)가 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인들의 상업지구가 되었다.
해방 이후 이곳은 다시 명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으며, 이곳에 있던 일본인들의 카페와 바, 깃사텐(喫茶店)들은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술집과 다방이 되었다. 1950~60년대의 명동은 명동백작 이봉구를 비롯하여 많은 예술인들과 문인들이 사랑하는 장소였다.

서울 건축 읽기 관련 이미지1 왕실다방 입구.
2 오픈되어 있는 주방.
3 계산에 사용되는 테이블 번호가 쓰여 있는 그릇과 다양한 컬러의 단추.
4 왕실다방 내부.

화교들의 중심지, 그 한가운데의 왕실다방

현재 왕실다방이 위치한 명동2가 105번지 일대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화교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왕실다방의 바로 옆에는 구 중화민국 국민당 한국지부(삼민주의대동맹 한국지부)가 위치하고 있으며, 건너편에는 중화인민공화국 한국대사관과 한성화교소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한편 왕실다방의 서측에 위치한 건물은 한성화교협회회관으로 1, 2층에 자리 잡은 대부분의 상점과 식당 등은 화교들이 운영한다.
한성화교들의 중심지와 같은 이곳에 자리 잡은 왕실다방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면, 다방왕 이지재가 경영한 다방 중 하나이며, 65년 된 다방이라는 내용 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조갑제가 조선일보에 1998년 연재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는 박종규 소령과 김종필, 김용태 등이 장면 총리 체포 계획을 세우던 장소로 왕실다방이 등장한다. 이 내용들이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왕실다방이 그곳에서 오랫동안 격동의 시간을 겪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왕실다방 주변 지역은 모두 전후 서울시 토지구획 정리사업의 제1중앙지구에 속해 있었다. 왕실다방 바로 옆의 구 중화민국 국민당 한국지부 건물이 1954년에 건축된 것으로 보아 왕실다방이 있는 건물도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방이 영업을 시작한 것 역시 1950년대 이후의 일로 예상되는데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왕실다방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중앙우체국의 북쪽 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의 화려한 정문을 마주하게 되는 즈음, 그 왼편을 바라보면 ‘왕실다방’이라는 동그란 간판이 달린, 낡았지만 여전히 반짝반짝한 벽돌타일로 된 아치형 입구가 보인다. (참고로 왕실다방과 마주하고 있는 KT 명동지사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의 작업이다.) 관심 없이 지나면 그다지 눈을 끌지 않는, 이 작은 입구로 들어서면 생각보다 꽤 큰 실내공간이 등장한다. 접객공간인 동시에 왕실다방의 중앙으로 가는 통로와 같은 이 입구를 지나노라면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떠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래되었지만 정갈하게 놓인 인조가죽 소파에 몸을 기대면, 벽에 붙어 있는, 형광색 종이에 손으로 쓴 듯한 메뉴판으로 눈길이 간다. 메뉴판의 형식도 현재의 관점에서는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거기에 쓰인 가격은 더욱 놀랍다. 여전히 이 가격에 차를 파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놀랍고, 그 메뉴에서도 묘한 향수가 느껴진다. 마시고 싶은 차를 골라 주문하면 오픈되어 있는 주방에서 사장님이 커다란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오래된 장소인 만큼 이곳을 찾는 이들도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많다.
차 한 잔을 하고 계산대로 가는 순간, 또 한 번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한 기분이 든다. 여러 개로 칸이 나뉜 그릇에 테이블 번호가 쓰여 있고, 그 번호가 쓰인 칸에 형형색색의 단추가 들어가 있다. 바로 이 단추가 이 다방 메뉴의 가격을 표시하는 도구들이다. 가게 사장님은 잰 손놀림으로 단추를 이용해 계산을 한다.
20세기 명동의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흘러갔다. 일본인들의 상업지구이자 한국 화교의 중심지였으며, 전후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이자 정치깡패들의 근거지였다. 또한 1970년대에는 패션의 중심지이기도 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중국인 관광객과 일본인 관광객에게 사랑받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토록 빠르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명동의 오래된 장소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왕실다방의 소중함은 여기에 있다. 빠르게 변해가는 주변의 시간에서 빗겨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공간이다.

글·사진 이연경_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건축역사이론 전공으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원대, 단국대,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등에 출강했으며 연세대 학부대학 학사지도교수로 근무했다. 주요 저서로 <한성부의 ‘작은 일본’ 진고개 혹은 本町>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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