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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시인 박장호의 유년의 추억아카시아 향기를 닮은 무악동
종로구의 끝자락에 위치한 무악동은 1975년 10월 1일, 서대문구 현저동의 일부가 종로구로 편입되면서 붙은 이름이다. 같은 해에 그곳에서 태어나 30년을 산 박장호 시인은 무악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한다. 그는 아파트가 들어선 지금의 무악동이 아니라 그때의 무악동을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고향 추억은 아카시아로 시작된다.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

내가 태어난 마을은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는 무악재 넘기 전, 인왕산 기슭에 있었다. 나는 2월생이니까 그때는 아직 무악동이 아니라 현저동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마을을 아카시아골이라고 불렀다. 이름 그대로 아카시아가 많은 마을이었다. 똥골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한성과학고등학교 부지 길 건너편이었으니까 똥골과 아카시아골이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던 셈이다. 어른들은 사라진 그곳을 아직도 아카시아골이라고 부른다.

시끄럽고 다정했던 동네

무악동의 구체적인 기억은 두 번째 집에 살 때부터 시작된다. 4~5살 때부터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던 그 동네는 담장 사이로 사람 하나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작은 동네였다. 집들의 거리만큼 이웃들이 가까워서 옆집 할머니가 어디가 아픈지, 오늘은 어떤 반찬을 해서 먹는지, 우리가 시험에서 몇 점을 맞았는지, 통지표에 ‘수’가 몇 개 있는지 다 알았다.
좁은 동네였지만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손바닥만 한 터가 있었다. 그곳에 이집 저집 아이들이 모여 팔짱을 끼고 꼬리에 꼬리를 잡고 “우리 집에 왜 왔니”, “동 동 동대문, 남 남 남대문” 노래를 불렀다. 과자와 사탕을 실은 장난감 기차의 기적 소리에 맞춰 현란한 발기술을 자랑하며 고무줄놀이를 하는 누나들도 있었다. 우산 밑에 살림을 차리고 소꿉놀이를 하면 “쟤네들 결혼했대요” 놀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추억남자애, 여자애 구별 없이 놀았다. 아이들 노는 소리에 조용할 날이 없는 동네였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심술쟁이 할머니가 딴 데 가서 놀라고 담장 위에서 바가지 물을 끼얹어도 아이들에겐 물벼락 피하는 것마저 놀이의 하나였다.
홍콩 할머니가 심장을 빼먹는다는 이야기가 돌아 모두 모여 손에 손을 꼭 잡고 학교에 갔다. 시절이 수상해 대학생 형이 살던 옆방에 경찰이 들이닥치기도 했고 아이들만 있는 집에 도둑이 들기도 했다. 엄마 목소리를 흉내 내는 전래동화의 호랑이처럼 그럴듯한 말로 아이들을 속인 뒤에 집에 있던 돈을 손에 넣고 줄행랑을 치기는 했어도 아이들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집에 꼭 사람만 살았던 건 아니다. 천장과 벽으로 쥐들이 돌아다녔다. 엄마와 누나가 잠자리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엄마가 섬 그늘에” 노래를 부르면 천장에서 쥐들이 왈츠를 췄다. 친구 분들을 데리고 아버지가 집으로 2차를 오시면 어머니는 없는 반찬으로 꾸역꾸역 술상을 차리셨고, 젓가락을 두드리는 아버지들의 콘서트 곁에서 우리도 쥐들도 제법 잠이 깊었다.

무악동의 사계절

3학년 때 다시 산 밑으로 이사를 갔다. 인왕사 일주문 밑에 있는 연립주택 단지였다. 봄이 오면 어머니를 따라 쑥을 캐러 다녔다. 어머니가 “이건 쑥이 아니야” 하고 웃으시면 쑥 찾는 내 머리 위로 제비나비가 맴을 돌며 그것도 모르냐고 약을 올렸다.
여름엔 아카시아를 따 먹고 살았다. 약수터에서 씻은 아카시아를 비닐봉지에 담고 이 바위 저 바위 오르락내리락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인왕산엔 바위가 많다. 바위가 많다는 건 숨을 곳이 많다는 뜻이고 숨을 곳이 많다는 건 놀기 좋다는 뜻이다. 3840 유격대(1983년에 방영된, 반공 유격대의 활약상을 그린 드라마의 제목)의 대원이 되어 아무리 쏘아도 총알이 떨어지지 않는 탄창을 입에 장전하고 혀가 얼얼하도록 나무 기관총을 쏘았다. 그러다가 지치면 일주문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에 들어가 땀을 씻었다.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들과 가끔은 게도 있었던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있으면 마루에 날아 들어올 만큼 하늘소가 많아서 곤충들의 이종격투기를 주최하기도 했다. 사마귀의 당랑권이 하늘소의 무쇠 턱에 힘없이 찢어지는 모습에 많이들 실망했다.
옥수수를 서리하던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면 더 신났다. 채석장은 각양각색의 방패연과 가오리연들이 날아오르는 경연장이었고 눈이 내려 쌓이면 동네 전체가 썰매장이었다. 아버지들은 톱과 망치를 들고 아이들이 탈 썰매를 손수 만들어주었다. 집집마다 아이들마다 썰매의 모양과 크기와 속도가 달랐다. 스케이트 날을 단 썰매가 가장 근사했다. 봅슬레이를 연상시키는 2인용 썰매를 타는 쌍둥이도 있었다. 옷과 장갑이 젖어 오들오들 몸이 떨리면 숲속으로 들어가 마른 가지를 주워 모닥불을 피웠다. 누군가 쥐포라도 꺼내면 세상 부러운 게 없다가도 담배 피우는 중학교 형들을 만나면 겁에 질려 산에서 내려오곤 했다.

아카시아만 남기고 사라진 동네

부모님을 뵈러 가끔 무악동에 간다. 무악동은 있지만 내 고향은 없고 아파트들만 우뚝우뚝 솟아 있다. 계곡은 물이 말라 시멘트에 뒤덮였고, 아카시아야 여전히 많은 편이지만 그걸 따 먹는 아이들은 없다. 천장 쥐들의 군무를 상상했던 마음은 위층 사람의 발소리도 듣기 싫을 만큼 삭막해졌다. 함께 놀던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임금바위(요즘엔 얼굴바위라고 부르는 것 같다.)만 그때와 다름없이 무악동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공간이 변하는 걸 막을 수야 없겠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고향을 추억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가고 있을 테지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가깝고 촘촘한 거리를 똑같이 생긴 아파트 단지로 요약하는 과정에서 내 고향이 불필요한 문단처럼 생략되어버린 건 두고두고 야속하기만 하다.

글 박장호_ 시인. 수면 여왕을 지키는 수면궁의 문장 기사. <나는 맛있다>, <포유류의 사랑> 2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림 정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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