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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침묵을 작곡하는 사람들, 반델바이저 악파 소리와 침묵, 삶과 예술의 경계에 대해
현대음악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음악가가 대중에게 익숙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기보다는 많은 경우 ‘음악’이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반델바이저 악파는 그 극단에 있는 이들이다. 그들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어떤 개념을 찾기보다 버리는 게 좋다. 기존의 음악에 대한 기대나 관념을 내려놓았을 때, 침묵을 파고드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전혀 다른 음악을 듣게 될 것이다.

지하철 6호선 상수역에 내려서 몇 걸음 걸으면 오피스텔이 하나있다. 평범해 보이는 이 공간에 벨을 누르고 들어가면 등받이도 없는 조그만 의자들이 놓여 있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어색하게 앉아서 한 방향을 바라보며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8시가 되자 그들이 바라보던 책상에 키가 190cm쯤 돼 보이는 중년 백인 남성이 다가가 앉아서 말 없이 종이 한 장을 바라보며 뚜껑이 닫혀 있는 펜촉을 이따금씩 그 종이에 갖다 댔다가 떼었는데 그 소리는 들릴 듯 말 듯했다. 5분쯤 지나니 나름대로의 일관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지가 되었지만, 정확히 어떤 법칙으로 타이밍을 잡아 펜촉을 종이에 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규칙적인 듯한데 아니기도 했다. 억겁과 같은 시간이 지난 듯했지만 단 5분이 지나있을 뿐이었다. 이 “공연”은 9시가 넘도록 계속되었고, 연주자(?)의 진지한 태도는 공연이 끝나는 순간까지 지속되었다.
이날은 스위스의 작곡가 만프레드 베르더가 자신의 작품을 ‘닻올림’이라는 즉흥음악 공연장에서 연주한 날이었다. 그는 침묵과 극도로 미미한 소리를 소재로 삼아 작곡을 하는 ‘반델바이저(Wandelweiser)’의 일원이다.

신지수의 음악 정원으로 관련 이미지1, 3, 4 상수역 인근에 있는 공간 ‘닻올림’(www.dotolim.com)에서는 만프레드 베르더(사진4)의 공연이 여러 차례 진행됐다. 사진1은 2013년 4월에 진행된 공연 홍보 이미지, 사진2는 올해 7월에 있었던 만프레드 베르더와 기획자·연주가 로 위에(lo wie)의 공연 장면.
2 존 케이지의 <4분 33초>의 악보.

소리와 침묵의 관계를 탐구하는 음악

20여 명의 작곡가로 이루어진 반델바이저 악파의 작곡가들은 일반인이 잘 모르는 현대음악 작곡, 그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사조를 이루고 있다. 음악과 행위예술의 세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추구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반델바이저는 기존의 음악회장에서의 작품 발표(악기, 또는 성악가가 악보를 보며 시작과 끝이 분명한,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에 도전한다. 그렇다고 파격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소리와 침묵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소리들을 탐구하고자 한다.
피아니스트가 무대로 나와 피아노 뚜껑을 연 후 4분 33초만에 다시 피아노 뚜껑을 닫고 무대 밖으로 나온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가 초연되었을 당시, 이 공연이 이루어진 현장에서 관객들이 낸 소리가 유일한 ‘음악’이었다. 이 곡에서는 연주자가 완전한 침묵으로 일관된 작품을 연주(?)했지만, 만약에 엄청나게 작은 소리들을 오랫동안 연주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또한 연주자의 연주와 객석에서 나는 소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반델바이저는 바로 이 현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극단적으로 파격적인 현대음악을 만들지만, 반드시 그 소리가 소음이거나 불협화음은 아니다. 일반인의 귀에 익숙한 조성음악의 소리를 마음껏 차용하기도 한다. 다만, 그 화음들이 기능적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 일단 하나의 음이 너무나도 작고, 그다음 음이 어마어마하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울려 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진공 상태에 있는 듯 무척 지루할 수도 있는 시간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청각을 총동원해 ‘음악’을 찾아 들으려 하게 되고, 문득 그 어느 때보다도 ‘음악’과 가까이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에 대한 자각이 극대화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음이 줄 수 있는 위로

소리와 침묵의 관계, 연주자와 객석의 관계를 파헤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일상생활과 연주의 경계 또한 허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위에 언급한 만프레드 베르더의 작품의 경우 각 페이지를 공연하면 다시는 다른 곳에서 재연되지 않아야 하며, 공연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아직 공연되지 않은 새로운 페이지를 작곡가에게 직접 건네받아 그걸 연주해야 한다. 악기 편성은 자유지만 연주자 수에 따라 각기 다른 곡이 작곡(?)되어 있기 때문에 사전에 통보해 올바른 악보를 건네받아야 한다. 관객은 없어도 되고, 단지 지구상 어디에선가 이 공연이 행해지기만 하면 된다. 이 악보는 A4용지에 숫자만 적혀 있고 음표는 단 하나도 적혀 있지 않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악보(?)들을 전부 이어서 연주한다면 아마 500시간이 넘을 것이다. 뉴욕 출신 작곡가 크레그 셰퍼드(Craig Shepard)의 경우 31일간 스위스를 도보로 횡단하며 매일 하나의 트럼펫 곡을 작곡하고 이를 그날 저녁에 연주했다. 이 경우도 작곡과 연주, 작품의 개념이 하나의 예술 행위로 귀결되면서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현장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이 점에서는 행위예술의 특성과도 교집합을 강하게 이룬다.
‘아이디어가 곧 예술’이라는 개념미술의 모토를 음악에 대입한다면, ‘개념음악’이라는 단어로 반델바이저를 분류할 수 있을까? 반델바이저라는 단어 자체도 다다이즘의 ‘다다(dada)’ 못지않게 모호한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억지로 번역하자면 ‘변화의 지표’ 또는 ‘변화를 현명하게 하는 사람’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사실상 표준 독일어에도 없는 단어이고, 결합되기 이전의 두 단어 반델(wandel)과 바이저(weiser)가 암시하는 의미만이 반델바이저의 뜻을 추측하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단어 뜻에서부터 악보, 음 재료, 소리, 연주 형태 등 모든 것이 애매모호한 반델바이저 악파는 결국 그 존재 자체로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의 삶은 어디부터가 연극이고 어디까지가 리허설인가, 우리가 추구하는 ‘진짜’는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기 위해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하나의 멋진 작품을 완성해 발표하겠다고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그들은 삶과 예술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듯이, 반드시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인생은 하루하루 자체가 작품이고, 모든 사람이 창작자이며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은가? 그 어떤 드라마틱한 선율도 이루어낼 수 없는 가치를 단 하나의 음만으로도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접하며 잔잔하지만 강렬한 감동을 받게 되었다.문화+서울

글 신지수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유학을 마친 후 현재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현대음악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즐긴다.
블로그jagto.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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