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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7월호

김호준 작 바람을 잡다

10분 희곡 릴레이 관련 이미지

* <10분 희곡 릴레이>는 젊은 작가 혹은 지망생들의 재기발랄한 10분 단막극입니다.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人에 가시면 더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webzine.e-stc.or.kr)


등장인물   바람잡이
때   본공연이 시작되기 전, 이른바 공연 직전


*** 단막극 공연의 첫 번째 순서로 공연되길 바라며,
바람잡이는 관객들에게 이 작품이 공연이라고 생각되지 않게끔
자연스럽게 진행되길 하는 바라는 마음이다.

본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바람잡이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바람잡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가 왜 여기 나왔는지 알고 계신 분 혹시 계신가요? 네, 맞습니다. 공연 중엔 휴대폰 전원 꼭 꺼주시는 거 알고 계시죠? 사진 촬영과 음식물 섭취는 공연 끝난 후에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의 힘찬 박수와 함께 공연 시작하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전에 우선 양해의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지금 종로3가 쪽에 크게 사고가 나서 교통이 마비가 되는 바람에 차들이 꼼짝도 못하고 지하철도 사람들로 폭발 상태라고 하네요. 그래서 저희 배우가 지금 전력질주로 뛰어오고 있습니다. 약 10분 후면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니 관객 여러분께 정말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이런 경험 처음이시죠? 저도 처음입니다. 지금 뛰어오고 있는 배우한테도, 극장에 있는 여러분과 저한테도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네요. 지금은 입에 침이 마르고 발을 동동 구르지만 배우들한테는 이런 경험이 나중엔 좋은 자산으로, 관객분들에게는 특이한 기억으로 남게 되겠죠? 저도 지금은 이렇게 나와서 바람잡이를 하고 있지만 원래는 배우거든요. 혹시 다른 공연에서 저 보신 적 있는 분 계신가요? 역시나 아무도 안 계시는군요. 아직 알아봐주는 이 하나 없지만 저도 벌써 5년차 배우입니다. 여러분이 아실 만한 작품 중에는 <햄릿>에서 ‘병사 5’,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신하 2’, <템페스트>에서 ‘원숭이’, 얼마 전엔 <페리클레스>에서 ‘전사’ 역할을 했고요. 공연은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나왔는지는 아마 잘 기억이 안 나실 거예요.
많은 분께서 제가 연극하고 있다고 하면 갑자기 측은한 눈길로 애처롭게 쳐다보세요. 물론 다른 일 하는 거에 비해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돈이 없다고 해서 불행한 건 아닙니다. 다만 조금 불편할 뿐인 거죠. 돈까스 먹고 싶은데 떡볶이 먹고, 리바이스 청바지 대신에 유니클로 청바지 입고, 막차 끊겼을 때 택시 대신에 심야버스 타고. 조금 불편할 뿐인 거지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무대에 올라올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있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는 것 같아요. 이름 없는 배역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그걸 연기하는 저도 대수롭지 않은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나 봐요. 이름이 없어도 무대에 있는 순간에는 그 인물로 존재하기 위해 끝없이 고민하고 열심히 연기하는데 말이죠. 대본에 이름이 없는거지 그 인물의 삶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서 성공하려고 하는 이유는 잘 먹고 잘살려고 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잖아요. 인정받는다는 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거고,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이름이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는데 사람은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싶어 하니깐요. 일두 엄마, 재희 아버지, 김 대리, 박 과장님 같은 말이 아니라 전채옥 여사, 김진만 사장님처럼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의 친밀감과 존재감이 훨씬 더 큰 것처럼 말이죠. 거래처 갔는데 거기 직원이 본인 이름을 자꾸 틀리게 부르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단골집 가서 밥 먹는데 아주머니가 이름 불러주면서 반겨주면 그건 또 얼마나 기쁩니까? 별거 아닌데 받는 상대방은 그게 별거 아닌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한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제 배역들이 이름을 갖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불려지고 싶어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저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어 인물로서 그 존재로 생생히 살아 있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연기하는 그 인물도, 또 저도 그만한 가치가 생길 것 같거든요. 배우일 때는 이름이 불려지는 존재로, 바람잡이로 무대에 올랐을 때는 바람잡이로서 이 순간 열심히 존재해서 관객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더 열어드리고 부담 없이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긴 얘기를 떠들었네요. 제 얘기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는데 사실 오늘 늦게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우들은 공연 3시간 전부터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여러분께 제 바람을 말하고 싶어서 그렇게 얘기한 거니깐 오늘 공연에서 누가 늦게 왔나 하면서 보실 필요 없이 기분 좋은 마음으로 공연 즐겁게 관람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인 얘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큰 박수와 함께 공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바람잡이 ‘○○○’이었습니다.

바람잡이,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멋지게 퇴장한다.문화+서울

작가소개
서울예대 연극과로 입학했으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극작과 수업을 그렇게 많이 듣는 괴상함을 보이더니 결국 글은 한 번도 안 쓰고 졸업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 하지만 뜻밖의 기회에 오세혁 작가의 말에 넘어가(?) 극작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대한민국에 본인의 이름을 알리겠다는 당찬 포부를 갖고 있었으나 서른한 살이 된 현재 아직 대학로에도 이름을 알리지 못한 연극쟁이. 그러나 그의 바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연극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또한 변함없다고 한다.
배우로서는 물론이고 작가로서도 무한하고 유쾌한 발전 가능성을 내포한 대한민국 연극계의 기대주. 극단 여행자의 비주얼을 담당하고 있으며 간판 배우로 맹활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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