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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대중매체, 여성·노동자·약자의 현실을 그리다 성실하고 막돼먹은 앨리스들의 초상
‘사회생활 명언’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서 유행한 우스개가 있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사람을 얕본다’ ‘일찍 일어난 벌레는 잡아먹힌다’ 등이 여기 속해 있다. 성실, 존중 등은 먹고사는 데 딱히 도움이 안 된다는 냉소로 읽힌다. 최근 선보인 몇몇 영화와 드라마에서 이런 냉소는 잔혹 누아르, 블랙 코미디, 호러 등의 옷을 입고 한국의 약자, 특히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무섭게 읊조린다.

영화 오피스 포스터 이미지

전혀 다른 장르로 그린, 한국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

<암살>과 <베테랑> 두 편의 한국영화가 2015년 극장 흥행을 주도하는 한편, 그 뒤에서는 또 다른 두 편의 한국영화가 조용히 들끓고 있다. 하나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며, 다른 하나는 <오피스>다. 지난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 수상작인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일찌감치 영진위 통합전산망 집계 누적 관객수 4만 명을 돌파하며 독립영화로는 상당한호성적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반면 <오피스>는 전형적인 상업영화다. 평범한 식품회사 영업팀을 배경으로 연쇄살인극이 펼쳐지는 영화는 배우들의 호연과 익숙한 배경을 공포의 공간으로 전이시키는 우직한 연출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실 둘은 전혀 다른 영화처럼 보인다. 하나는 누아르에 블랙 코미디를 얹어낸 색다른 인상의 독립영화이며, 다른 하나는 사무실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공포영화의 무대로 변모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두 작품은 묘하게 대구를 이룬다. 각기 다른 장르의 영화라는 것과는 무관하게 이 땅의 노동자들, 특히 여성 노동자의 현실이 영화의 가장 주요한 기저이자 핵심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낯설게 다가올 법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경우에도 한국이라는 낯익은 배경이 보태는 힘은 실로 막강하다. 덕분에 과장되고 왜곡된 블랙 코미디 장르의 등장인물 모두 상당한 리얼리티를 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처한 비정한 상황 역시 공감과 몰입을 자아낸다. 명실상부공포영화의 품새를 갖춘 <오피스> 또한 마찬가지. 영화는 살인의 동인을 포함해 다양한 지점에서 관객의 직·간접 경험을 자극함으로써 불쾌감을 부채질한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포스터 이미지

지극히 현실적인 ‘약자들의 악다구니’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자신의 힘 하나만 믿고 성실히 살아가려는 수남(이정현 분)의 수난사를 그린다. 단지 열심히 살아가려 했을 뿐인데도 그에게 세상은 가혹하기만 하다. 그런 수남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바 로 은행 빚으로 산 집이 재개발 예정지에 포함되면서 바야흐로 인생역전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재개발이라는 달콤한 과육을 탐하는 이는 너무도 많다. 수남과 대치하며 피를 흘리는 사람들 모두 비슷한 처지의 고단한 생활인일 뿐인데도 이들은 서로를 보듬어주기는커녕 상처 입히는 데 여념이 없다. 우리 사회의 약자일 게 분명한 이들이 서로를 잡아먹고자 이전투구를 벌이는 광경일랑 참으로 잔혹하다.
약자들끼리 경쟁을, 아니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는 흔하다. 하지만 그 무대가 바로 우리네 사회라는 데에서 이 작품의 특별함이 배어나온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익힌 손재주를 이제는 생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수남 덕에 잔인한 장면도 여럿 등장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잔인한 것은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나만 열심히 하면 돼”라며 스스로를 독려하던 수남의 인생관이 결국 허상에 불과했다는 데 있다. 한 의사는 수남에게 ‘존엄사’에 대해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살다보면 가끔 품위가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존엄이라는 말이 고작 죽음을 이를 때에야 비로소 적용되는 잔인하고 비루한 현실이 결국 수남의 삶의 굴곡 끝에 놓인 진실이라는 얘기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블루칼라 노동자의 이야기였다면 <오피스>는 화이트칼라의 이야기다. 성실한 회사원이던 김병국 과장(배성우 분)은 느닷없이 망치로 온 가족을 살해한 뒤 사라진다. 이후 그가 출근하는 장면이 회사 CCTV에 포착되지만 그가 회사를 빠져나간 화면은 어디에도 없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동료들, 그리고 아직 회사에 있을지도 모르는 김 과장의 묘연한 행방과 연이어 발생하는 기묘한 사건들이 공포영화의 외연을 이룬다면, 마찬가지로 회사라는 곳의 생태는 그대로 우리의 잔혹한 현실과 맞닿 다. 무례하고 고압적인 상사는 늘 부하직원을 닦달하고 멸시한다. 다른 직원들 역시 동료라기보다는 경쟁자에 불과하다.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던 김병국 과장은 동료들에게 따돌림당했고, 인턴사원 미례(고아성 분) 또한 김 과장처럼 단지 열심히 일만 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며 핀잔을 듣기 일쑤다. 영화는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마저 진급을 앞둔 직장인으로 그리는데, 심지어 경찰들은 어느 기업의 노조위원장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진 자, 강자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약자들끼리 악다구니를 벌이는 것이다.
한편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은 직접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인터뷰해 다루며 노동의 공포와 불안정한 미래를 이야기한다. 열네 번째 시즌을 선보이고 있는 시트콤 <막돼먹은 영애씨> 역시 평범한 직장인들의 비애 어린 일상이 그 주제다. 시트콤이라는 장르가 무색하게 어렵사리 구축한 약자들의 연합은 배신을 강요당하고, 약한 자는 자신보다 더 약한자를 겁박하는 상황들이 내내 씁쓸한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결국 약자를 향하는 분노, 방향을 바로잡아야

이런 작품들이 연이어 만들어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용 전망 2015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최저임금 또는 그 이하 노동자 비율은 전체 14.7%(2013년 기준)로 조사 대상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노동시간은 2007년 멕시코에 1위를 내준 이후 여전히 전 세계 2위를 고수 중이며, 여성과 남성의 임금격차는 독보적 세계1위다. 현대경제연구원 계층 상승 사다리에 대한 국민의식 설문조사에 의하면 열심히 노력해도 계층 상승은 어렵다는 부정 응답률이 2015년 81.0%에 이르며, 응답자의 90.7%가 부와 가난의 대물림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여기에 더해 한 여당 정치인은 “노조가 쇠파이프 안 휘둘렀으면 국민소득 3만 달러 됐을 것”이라며 노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미국이 누리고 있는 모든 혜택은 과거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투쟁한 산물”이라 했던 오바마 미대통령의 발언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런데도 국가는 그저 아이를 낳으라고만 다그친다. 마치 새로운 노동자를 계속 만들어내라는 말처럼 들린다. 흡사 가축, 아니 국축(國畜)이 따로 없다. 상황이 이럴진대도 우리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당연히 양성평등으로 나아가야 할 사회 곳곳에서 ‘여혐’을 북돋고, 몰상식을 들어 아이엄마와 노인을 타자화한다. 약자를 향한 분노, 결국 우리를 겨냥하게 될 괜한 분노다. 그 잘못된 분노가 이곳을 더더욱 지옥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노릇이다. 지금이야말로 분노의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할 때다.문화+서울

글 강상준
등의 매체에서 줄곧 기자로 활동하면서 영화, 만화, 장르소설, 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 살았다. <위대한 망가>를 썼고, <매거진 컬처> <젊은 목수들>를 공저했으며,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을 번역했고, <좀비사전> <탐정사전>을 기획, 편집했다. 현재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겸 프리랜스 편집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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