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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2022 〈돈화문 나들이〉 현재의 젊은 국악인이 들려주는
과거의 명창·명인 이야기

〈돈화문 나들이〉는 2018년 가을에 처음 시작됐다. 국악로 주변을 돌아보면 근현대 국악의 면모를 소상히 알게 된다. 국악로에서도 특별히 몇 개의 지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이왕직 아악부(운니동 98번지), 조선성악연구회(익선동 159번지), 명월관(돈의동 145번지), 운당여관(운니동 79의 1번지), 오진암(익선동 34의 6번지), 새동산다방(묘동 150번지), 대각사(봉익동 3번지) 등이다. 국악로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나 조선음악무용연구회(경운동 47번지), 한국정악원(훈정동 97번지)도 한국 근현대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다.

국악인 주보라

〈돈화문 나들이〉를 통해 둘러보는 옛 국악인의 자취

오진암梧珍庵은 서울특별시 음식점 1호 업소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요정料亭이다. 1972년 5월 30일, 오진암에서 밤 공연을 위해 박범훈, 최경만, 김영재 등이 출근했다. 그런데 오진암 주변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연주단은 당시 인간문화재 황혜성의 궁중음식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은 후 서약서를 썼다. 여기서 본 것을 일체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약조였다.
그날 밤, 남측의 이후락(중앙정보부장)과 북측의 박성철(제2부수상)이 7·4남북공동성명의 사전 준비를 위해 만났다. “술에 독약을 타지 않았으니 마음껏 마십시다.” 당시 이후락이 건넨 농담은 지금도 국악인 사이에서 전설로 통한다. 국악인이 설 무대가 많지 않았던 시절 오진암은 한국의집, 워커힐 가야금식당 등과 함께 국악인의 좋은 일자리 구실을 했다.
몇 해간 〈돈화문 나들이〉의 투어 대상에서 조선성악연구회가 제외됐다. 골목 안에 위치해 있고 유동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커다란 한옥 건물은 현재 두 개의 식당과 일반 가정집으로 분리됐다. 한옥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아쉬우나 1930년대 본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개보수를 통해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를 기대한다.
〈돈화문 나들이〉를 통해서 후대에게 매우 재미있게 알려진 장소는 새동산다방이다. 지금은 휴대폰으로 다른 사람과 연락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 새동산다방은 국악인의 집결지였고 인력시장이었다. 국악과 관련된 대부분의 섭외가 새동산다방에서 이뤄졌다. 방송국이나 유명 요릿집에서도 특정 국악인과 소통하거나 국악인을 섭외하기 위해 새동산다방에 연락을 취했다. 그곳에 국악인은 늘 진을 치고 있었다.
1979년 5월 31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상경한 후 주로 국악로 주변에서 살았던 인간문화재 박녹주 명창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화장을 원해 한 줌의 재가 돼 안치된 곳이 바로 대각사다. 대각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불교의 대중화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장소다. 또 범패를 비롯한 불교음악의 전승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공간이다.

주보라, 유태평양과 함께한 〈돈화문 나들이〉

6.25전쟁 이후 국악로에는 명창·명인의 국악 학원이 참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청구고전성악학원靑邱古典聲樂學院이다. 훗날 선소리산타령의 인간문화재가 된 이창배1916~1983는 여기서 경서도창京西道唱의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아쉽게도 청구고전성악학원은 도로 확장으로 인해 그 위치를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창배 명창의 생가는 봉익동 1번지다. 순라길에 면해 있는 이곳을 국악하는 젊은이는 기억하길 바란다.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경기음악에 기반을 두고 민속음악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지영희·성금연 부부다. 이들은 안타깝게도 해외에 거주하면서 국가무형문화재로서의 자격은 잃게 됐다. 두 사람과 국악을 하는 자녀가 거주한 곳이 봉익동 13번지다. 이곳은 날마다 그 제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으로 유명하다. 지영희 명인은 제자에게 꼭 식사를 챙겨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집에서 한 달에 소비되는 쌀이 몇 가마니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국악로 주변은 이렇게 비록 어 렵게 살았지만 온기만큼은 충만한 국악인의 삶의 터전이었다.
서울돈화문국악당의 2022년 〈돈화문 나들이1〉(9.5~9.15)는 젊은 아티스트와 신청자의 동반 투어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이 중에서 가야금 연주가 주보라, 소리꾼 유태평양의 〈돈화문 나들이〉는 기록할 가치가 있다. 가야금 연주가 주보라는 〈돈화문 나들이〉를 통해 과거의 국악과 이를 대하는 자신의 시각을 연결해 즐겁고 알찬 투어를 만들었다. 그의 투어에 등장한 인물이 황병기1936~2018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가회동이다. 황병기는 6.25전쟁 때 부산에 설립된 국립국악원(용두산공원)에서 인연을 맺고 환도 후 국립국악원(운니동)을 통해 국악과 더욱 가까워졌다. 여기서 국악 강습을 받으면서 만난 사람이 바로 아내인 소설가 한말숙이다.
소리꾼 유태평양의 〈돈화문 나들이〉는 진솔했다. 돈화문 지역의 국악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하면서 스승과 스승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스승은 조통달 명창, 스승의 스승은 박초월 명창1917~1983. 이들이 국악로 주변에 거주하면서 제자를 길러낸 것이 국악예술학교와 연관이 있다. 1960년 5월 13일, 국악예술학교가 관훈동 197-10번지 3층 양옥에 터를 잡았다. 박초월·김광식 부부를 비롯해 많은 국악인의 삶이 이곳과 연관이 깊다.
유태평양의 판소리는 박초월에서 조통달로 이어지는 소리다. 판소리 신동 유태평양이 소리를 하게 된 것은 아버지 유준열1958~2011의 절대적 영향이 크다. 유준열은 국악에 대해 선각자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에 의해 어린이도 판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변성기를 거치면서 유태평양은 판소리를 잠시 쉬고 타악을 전공했다. 이 시절, 유태평양은 아버지와 함께 국악로에 오게 됐다. 〈돈화문 나들이〉에서 유태평양이 들려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여기서 판소리를 배우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또한 언젠가 국악로의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 국악 명인·명창의 주요 활동지였던 국악로(현 돈화문로)를 국악인과 함게 탐방하는 서울돈화문국악당의 행사

국악인 유태평양

윤중강_국악 평론가 | 사진 제공 서울돈화문국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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