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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창작산재×창작집단 여기에 있다 <이삯 줍는 여있들> 볍씨 한 톨에 담긴 가능성의 힘

연극 <이삯 줍는 여있들>에 참여한 관객은 부엌에서 대기한다.
연극 노동과 농사일의 노동이 닮았다.

농촌의 여인네가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면서 볍씨를 고른다. 뉴스를 보며 세상사에 대해 한탄하고, TV 프로그램 <6시 내고향>을 보며 다른 이의 농작물에 칭찬을 아끼지 않기도 한다. 기운 북돋는 노동요도 부르고 한 톨 볍씨에 희망을 담아 땅에 묻기도 한다. 간이 모판에는 한 해의 수확과 각자의 소망을 기원하며 갓 자란 모종을 심는다. 이 모든 농사일이 서울의 빌라 조그마한 방에서 벌어졌다.

나의 노동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공연은 부엌에서 대기하던 관객이 안방으로 안내받으면서 시작된다. 벼농사를 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은 방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데, 볍씨를 고르며 극단이 준비한 영상을 보고 랩에 가까운 민요로 관객·퍼포머 구분 없이 각자의 힘듦을 토로한다. 연출과 배우와 관객은 서로를 한 마을 주민으로 상정해 방 안에 둘러앉아, 모두의 이름을 외우고 관계를 형성하며 노동에 대한 진솔한 생각을 터놓는다. 그 과정에서 작품은 한 편의 공연을 완성하는 연극 노동과 농사일의 노동이 닮았음을 전달한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걸리는 일련의 노력 과정과 시간이 수확하기까지 벼농사의 그것과 닮았다.
공연은 ‘나의 노동은 타인에게 어떻게 이해될까’로 시작해, 역으로 ‘나는 타인의 노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로 나아간다. 실연과 동시에 휘발하고 마는 연극의 특성은 연극 노동에 종사 하는 이들에게 스스로 노동의 가치를 의심하게끔 만들곤 하는데, <이삯 줍는 여있들>은 그 지점을 살핀다. 퍼포머들은 배우로서, 연출로서, 연극인으로서 ‘나’의 노동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문하고, 자신의 노동에 어떤 가치와 대가가 있는지 되물으며 그것에 마땅한 삯을 찾고자 한다. 이 질문은 고스란히 관객에게로 돌아가는데, 각자 자신의 직업·노동을 상기하면서 각 질문에 해당하는 답을 떠올리다 보면, 그 끝에서 ‘나의 노동의 의미’라는 화두를 만나게 된다. 전반적으로 관객 참여에 의의를 둔 공연이었기에, 공동이 참여한 짧고 간단한 간이 벼농사의 과정은 명징한 답 대신 사유를 유도하는 담론의 장을 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알알이 맺힐 결실을 기대하며

<이삯 줍는 여있들>은 ‘발표회’라는 이름의 공연으로서, 2022년에 예정된 본공연을 위한 청사진에 가까웠다. 본공연에서는 실제 벼농사를 지을 계획을 하고, 이번 작업에서는 작은 아크릴 모판에 모형 모를 심는 과정을 연출했다. 자연히 이번 공연에서의 관객 참여는 나아가 본 공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지점이 분명해진 것은 흥미롭게도 공연이 끝난 이후였다. 공연 내내 고소하고 달큼한 밥 짓는 냄새가 퍼지더니, 마치 새참인 듯 수확의 결실인 듯한 식사 시간이 공연 종료와 동시에 이어졌다. 여타 극장에서라면 기대할 수 없을 일이 이 특별한 공간에서만큼은 가능해졌다. 관객은 극단 여기에 있다에서 미리 준비한 ‘밥상’을 받았다. 모두 함께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 먹고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뜻밖에도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화기애애한 관객과의 대화가 됐다. 퍼포머들은 관객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며 소통했고, 관객은 공연에서 느낀 바와 본공연을 위한 의견을 기탄없이 나눴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오가고 작품에 대한 계획은 점차 구체성을 띠었다. 결과적으로 현장 작업자들과 관객이 함께 구상하고 만드는 공연이 돼갔다. 관객은 늘 창작의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는 위치에 놓이는데, 관객 참여를 지향하는 공연들 또한 정해진 범위 외의 참여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관람과 창작의 경계는 분명하다. 반면에 <이삯 줍는 여있들>은 본공연의 내용과 형식을 관객과 함께 구상해 나간다는 지점에서 관객에게 관객 이상의 역할을 하게끔 한다. 마치 잘 고른 땅에 볍씨를 뿌리는 순간과 닮아 있다. 관객은 자신이 심은 볍씨에 어떤 모양의 쌀알이 맺힐지, 그 궁금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본공연을 찾을 것이다. 극단 여기에 있다는 오늘의 <이삯 줍는 여있들>을 성실히 가꿔 기존의 혹은 새로운 관객을 맞이할 것이다. 이처럼 미완의 실험작임에도 불구하고 <이삯 줍는 여있들>에는 관객에게 관람과 창작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을 제공하는 미덕이 있었다.
헤어지는 끝에 관객은 자신의 이름이 붙어 있는 쌀 주머니와 감귤을 선물로 받았다.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는 것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교감하는 행위와 같기에, 관객과 극단 여기에 있다 사이의 형식적 경계는 또 한번 희미해졌다. 공연을 넘어선 심리적 유대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이삯 줍는 여있들>에서 촉발된 공연 <이삯 줍는 여있들>은 ‘가능성’이라는 이삯을 남겼다. 다양한 가능성을 담은 볍씨와도 같은 공연이었기에 발아하고 싹을 틔워 알알이 맺힐 열매를 기대하게 된다. 수확의 시간에 그날의 우리는 아마도 다시 만나지 않을까 짐작한다.

장윤정 연극비평집단시선 소속. 연극 평론 및 드라마투르그 활동을 한다. | 사진 제공 창작집단 여기에 있다

※본 원고는 지면 관계상 편집됐습니다. 원문은 웹진 [연극i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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