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40주년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20세기 음악의 카멜레온
2021년은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중 하나인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서거 50주기였다. 마침 2022년 그의 탄생 140주년을 맞이한다. 러시아 출신으로 프랑스 국적과 미국 국적을 취득하며 전 세계를 누빈 거장 스트라빈스키를 재조명하기 좋은 시기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George Grantham Bain Collection
스타일 변신의 귀재
스트라빈스키는 1882년 6월 17일 러시아 오라니옌바움(현재 로모노소프)에서 유명한 궁정 소속 베이스 가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화성법과 대위법을 공부했다. 부모님의 희망에 따라 관리가 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음악 이론을 배웠다. 법학부에서 알게 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막내아들 블라디미르의 권유로 1902년 여름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스승으로 만나 개인 수업을 받았다.
1906년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졸업한 스트라빈스키는 작곡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즈음 한 살 연상의 사촌 누나 예카테리나 노센코와 결혼한다. 1907년에는 스트라빈스키의 교향곡 E플랫장조 Op.1과 메조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목신과 양치기> Op.2가 페테르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연주로 초연됐다. 1908년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 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관현악곡 <꽃불> Op.4를 완성해 보냈지만 스승은 세상을 떠나 초연을 듣지 못했다. 이 <꽃불>과 <환상적 스케르초>는 질로티가 지휘한 연주회에서 초연됐는데 이 연주를 듣고 발레뤼스(러시아 발레단)를 이끌던 댜길레프가 스트라빈스키를 주목하게 된다. 댜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발레 <라실피드>에 쓸 쇼팽 피아노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해 달라는 첫 주문을 한다.
1910년에는 발레 뤼스를 위해 작곡한 <불새>가 파리오페라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1911년에는 <페트루시카>를 성공리에 초연했다. 1913년에 연이어 <봄의 제전>이 파리에서 화제에 오르며 초연됐다. 당시 관객이 서로 큰 소리를 내며 싸워 연주가 들리지 않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평가는 급상승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이렇게 발레 음악 걸작 세 편으로 스트라빈스키는 ‘파리의 젊은 혁명가’로 이름을 드높였다. 당시 스트라빈스키는 우스티루에서 여름을, 스위스에서 겨울을 지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위스에 거처를 정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고국의 땅은 혁명 정부에 몰수당하고 수입도 챙기지 못했다. 발레 뤼스에서의 공연도 전쟁 때문에 막히자 스트라빈스키는 생활이 어려워졌다. 이 무렵 그는 러시아의 민중시와 우화를 바탕으로 한 토속 작품인 <여우> <결혼> <병사 이야기> 등을 썼다.
파리 시절 스트라빈스키는 코코 샤넬과 한때 사귀었다고 알려졌다. 파리에서 집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던 스트라빈스키에게 샤넬은 자신의 집을 제공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20년 파리에서 초연된 <풀치넬라>는 스위스에 있던 시절 작곡했지만 18세기 음악의 선율과 형식을 그대로 쓰면서 새로운 관현악법으로 음악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1921년 이후 프랑스에 정착하고 나온 신고전주의 음악의 신호탄이었다. 이러한 작곡 경향은 1951년까지 계속된다.
귀중한 창작곡을 남기다
댜길레프와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다. 1923년 초연된 <결혼>이 발레 뤼스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됐다. 기독교에 심취하게 된 스트라빈스키는 1926년 러시아 정교회에 귀의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당시 작품으로는 <관악 8중주> <오이디푸스 왕> <뮤즈를 이끄는 아폴론> 등이 있다. 이즈음 그는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고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등을 작곡했다.
1929년 댜길레프가 사망한 후, 바이올리니스트 사무엘 더시킨을 위해 쓴 곡과 <시편 교향곡> <카드 놀이> <덤바턴 오크스>를 비롯해 미국에서 요청받아 쓴 곡이 많았다.
1934년에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해 파리에 살지만 1938년 첫딸을 결핵으로 잃고 이듬해 아내와 어머니를 떠나보낸다. 당시 나치 정부는 전위적 작풍의 스트라빈스키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퇴폐 음악’이라며 비방했다.
스트라빈스키는 1935년과 1937년에 미국을 방문했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에는 하버드 대학의 의뢰로 미국 음악에 대한 강의에 여섯 번 참여한다. 그 후 그는 미국에 머물며 할리우드에서 살게 된다. 전부터 사귄 연인 베라를 미국으로 불러 1940년 결혼하고 1945년에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3악장 교향곡>, 발레 <오르페우스>, 오페라 <난봉꾼의 행각> 등 이 이 무렵의 대표작이다.
1951년 아널드 쇤베르크가 사망한 뒤 그동안 부정적으로 여긴 12음 기법을 조금씩 사용해서 창작 가능성을 넓혔다. 70세 가까이 된 작곡가가 시도한 작풍의 변모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칸티쿰 사크룸> <아곤> <아브라함과 이삭> <케네디를 위한 비가> 등이 있다. 1962년 스트라빈스키는 소련을 방문한다. 1914년 조국을 떠난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귀향이었다.
늘 푸른 나무 같던 스트라빈스키도 노쇠는 피할 길이 없었다. 건강을 이유로 음악 활동을 중단한 84세 이후로 새로운 곡은 작곡되지 않았다. 1967년 이후에는 지휘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편곡을 완성했고, 이후에도 편곡에 손을 대고 있었지만 더는 완성작이 나오지 않았다. 만년에는 조수 겸 동료 로버트 크래프트의 권유로 음반을 들으면서 지냈는데 특히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뉴욕으로 이사한 뒤 1971년 4월 6일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0세기 최고 작곡가의 마지막이었다.
스타일 변신의 귀재인 스트라빈스키는 ‘카멜레온’이라 불렸다. 데뷔 초에는 발레 음악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 등으로 원시주의 경향을 보였다. 낯선 리듬, 복조성 등이 특징이다. <풀치넬라>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가 열렸다. 간소한 작풍에 심취해 화성은 초기보다 간명해졌다. 12음 기법을 흡수하면서도 그는 조성의 음악적 생명력을 놓지 않았다.
스트라빈스키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컬럼비아 심포니, CBC 심포니 등을 지휘해 자신의 주요 작품을 직접 녹음했다. CD 22장 분량 이상의 방대한 자작곡 녹음을 남긴 작곡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휘 기술을 녹여 원작의 의도를 후대에 남긴 귀중한 유산이다.
글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 | 사진 제공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