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 이후, 모두가 안전하기 위해서 예술인의 인식 변화와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부산문화예술계 반성폭력연대’는 2016년 ○○계_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으로, 예술계에 만연한 성폭력 문화를 용인하지 않아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다. 2020년 부산연극계에서 안전하고 평등한 창작 환경을 만들기 위한 스탠더드 <Safe On Stage>(이하 S.O.S) 를 기획, 제작했다. 부산문화재단에서 프로젝트 결과 보고회 ‘연극살롱-세이프 온 스테이지’를 개최하고, 성폭력추방주간을 맞아 세미나를 진행하고, 성평등 포럼에서 과제와 전망을 논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현재는 부산문화예술계 미투 운동 기록 프로젝트 ‘WRWR: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기록한다’의 일환으로 출판물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S.O.S는 부산문화재단이 지역 연극계 관계자들과 미국 CTS(Chicago Theatre Standards)를 모델로 추진했으며, 극단별 워크숍 등을 거쳐 부산 연극계 상황에 맞는 규약으로 완성했다. 2020 문화다양성 무지개다리 사업으로서 부산에서 활동하는 심혜림·송진희·조은하가 집필했다. S.O.S는 ‘안전, 존중, 소통’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강제 규약은 아니지만 보편적 인권을 지킬 권리, 작품 전 단계부터 오디션·계약·연습·리허설·분장실·공연·뒤풀이 등 제작 전 과정에 걸쳐 실천 사항을 명시했다. 사전 예방 및 성희롱·성폭력 대응 가이드, 체크리스트, 피해자를 위한 Q&A, 참고자료 및 연계 기관 정보도 담겨 있다. 부산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고, 단체와 프로젝트 상황에 맞게 비영리적으로 수정·보완해서 사용할 수 있다. 이 덕분에 S.O.S를 참고한 극단 자체 내부 규약을 만드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S.O.S 내용 중 눈에 띄는 점을 곱씹어 보고자 한다. “공연장 안전지원센터에서 안전 교육과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을 사전에 듣고 숙지합니다.” “(계약서에) 나이·성별·장애·성적지향·성정체성 등에 관한 차별과 괴롭힘을 허용하지 않음을 명시합니다.” “신체적·정신적 불편함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성적 농담 및 외모와 신체에 대한 품평을 하지 않습니다.” “2차 가해가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에 유의합니다.” “나의 성인지 감수성을 점검하고, 전문가나 기관을 통해 교육을 받습니다.”
작년 하반기에 있었던 S.O.S와 KTS(Korea Theatre Standards,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에 대한 각각의 워크숍에서 공통되는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연극계에서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보편적 인권으로, 서로의 상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아무리 훌륭한 작품일지라도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 현장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엔 나도 작품을 좀 더 우선시하는 편이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사람을 잃고 몸과 마음을 다치고 나서야 사람과 안전이 먼저라는 걸 깨달았다. 예술 활동 중 어떤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피해를 본 개인의 책임으로 남겨지는 경우가 있다. 일용직 노동자인 예술인은 피해 회복 지원을 위해 혼자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론화 및 연대와 공동 행동이 필요하고, 구조가 개선돼야 할 것이다.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이 뜨겁게 일던 때 올라왔던 글 몇 개를 다시 찾아 읽었다. 지난 일이 될 수 없는, 여전히 살아 있는 말들이었다. AI 캐릭터에 대한 성희롱이 발생하는 시대에 절망을 느끼지만, 그나마 안전한 세계가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는 동료들이 있어 다행이다. KTS와 S.O.S가 만들어지기까지 힘써준 분들께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이러한 워크숍이 열리고 책자가 발간됐을 때, 현장 예술인과 기관 담당자, 예술을 사랑하는 모두가 빠짐없이 보거나 읽는 게 정말 중요할 것이다. 나의 언어로 체화해 다시 이야기할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논의의 장에 참여한 사람 대다수가 (지정 성별) 여성이라는 점은 문제이지만, 규약집을 함께 강독하고 토론하는 동료들을 만남으로써 서로 연결돼 있다는 안정감과 믿음,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CTS를 본보기 삼아 KTS와 S.O.S가 나왔듯, 많은 이가 이 ‘표준’을 현장에서 계속 적용하며 수정·보완해 더 나은 규약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궁극적으로는 자연스러운 문화로 잘 스며들기를 바란다.
- 글 박하늘_배우. 2010년에 연극배우로 공식 데뷔했다. 가끔 1인 창작물을 발표하고, 음성 해설을 한다. 손목과 무릎 손상 이후 공연도 일상도 선택의 폭이 달라지면서 다양한 일을 시도하고 있다. 먹고사는 일과 창작 활동의 교집합을 찾고 있다. skypark7909@naver.com
사진 제공 송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