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지나간다고, 모두 겪는 과정이라고, 성숙해질 거라고, 터널 끝을 건너간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막상 터널 속에 갇힌 사람들은 그 속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선의라고 생각하는 말들이 악의가 되어 떠도는, 나를 지키려는 거짓말은 타인에게 칼날이 되고야 마는 미성숙한 시간이 지옥 같다.
마치 나를 향해 끼얹어질 것 같은 물 한 잔이 얼음처럼 차가울지, 화상을 입힐 만큼 뜨거울지 알 수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덜 자란 시간 속 우리
같은 반 친구 경민(전소니)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전여빈)는 가해자로 지목된다. 딸의 실종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경민의 엄마(서영화),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형사(유재명),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싶어 하는 담임 선생님(서현우), 그리고 학교 친구들 모두 영희가 가해자라고 의심하며 잔인하게 군다. 그러다 실종된 경민의 시신이 발견된다.
김의석 감독의 장편 데뷔작 <죄 많은 소녀>는 약해서 끝내 악해지고 마는 사람들의 표정을 소녀의 실종이라는 사건 속에 담아낸다. 영화 속 사람들은 영희를 가해자로 지목하며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방관자들은 동조자 혹은 가해자로 재빠르게 표정을 바꾼다. 경민의 죽음이 이들 삶의 한가운데 있지만 정작 경민을 그리워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며 달라지는 이야기 속, 경계가 무너진 인물들을 통해 이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개개인의 적의가 얼마나 깊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감춰진 적의를 하나씩 드러내는 소녀들의 표정을 통해 김의석 감독은 죄의 값, 죄의식의 값, 그 값의 올바른 셈은 얼마인지 되묻는다.
늘 덜 자란 우리들의 시간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덜 익어 풋내가 난다. 그래서 끝내 우리는 경민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도, 끝내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은 영희의 선택이 진심인지, 유령처럼 떠돌며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한 소녀들의 사랑은 어떤 색깔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죄의식의 표정
영화 속 사람들은 계속 마음과 가장 다른 표정을 짓는다. 죽은 아이에 대한 죄의식과 자신을 지키려는 이기심 사이에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진심과 가장 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다. 선생들은 경민이 우울한 음악을 듣던, 원래 그런 아이였다고 편을 먹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손쉽게 똘똘 뭉쳐 영희를 가해자로 만들어 유령처럼 떠도는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한다.
알고 보면 사실 어느 누구도 진실을 원한 게 아니었다. 경민의 죽음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서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해줄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영희를 단죄하듯 폭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자신의 폭력이 마치 정의라고 착각한다.
두려워서 비겁한 건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영희의 아빠는 영희가 친구들에게 폭행당한 사실을 눈치챘지만, 영희의 처신을 탓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죄의식을 모른 척한다. 경민 엄마는 조금 더 비겁하다. 그녀는 온전히 경민의 죽음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끝내 죄를 덮어씌울 영희를 살려두고,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희를 향한 적의와 폭력은 영희가 자살 시도를 하고 목소리를 잃은 후 손쉽게 사라진다. 아이들은 표정을 바꿔 영희를 응원한다. 그 과정에서 소녀들은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단죄한다. 김의석 감독은 영화의 도입부와 영화의 중후반부에 영희가 수어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여준다. 도입부에는 자막 없이, 중후반부에는 자막을 넣었는데, 영희의 본심은 그렇게 목소리를 잃고 침묵한다.
사람들은 타인을 호되게 꾸짖어 자신의 죄의식을 감추고 위안한다. <죄 많은 소녀>는 지긋지긋한 삶 속에 찾아온 한 소녀의 죽음과 끝내 살아 있는 주위 사람들을 통해, 이기심의 극악함과 죄의식의 나약함을 눈 돌리는 법 없이 끝까지 들여다본다.
감독은 소년의 성장을 위해 소비되는 소녀라는 다수 성장영화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소녀를 이야기한다. 한 소녀는 그 긴 어둠을 끝내는 법을 먼저 알아챘고, 한 소녀는 계속 긴 터널 안에 갇혀 있다. 영화 속 영희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지나왔지만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한 뼘도 자라나지 않았다. 영희의 세계는 자라나는 세계가 아니라, 침잠하는 세계다. 바로 우리의 세계처럼….
- <죄 많은 소녀>(2018)
- 감독 김의석
- 출연 전여빈(영희 역), 서영화(경민 엄마 역), 고원희(한솔 역), 전소니(경민 역)
- 글 최재훈_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