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미아리고개는 어디에…
반세기 훌쩍 넘은 옛날 일이라 가물가물한데, 미아리고개를 찾아 나섰던 그날은 1965년이 끝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전차를 타고 종점인 돈암동에서 내리면 곧장 미아리고개가 나온다고 했으니, 아무리 촌뜨기라도 그런 것쯤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러나 전차의 종점에서 내렸는데도 미아리고개는 보이지 않았다. 돈암동이라는 글자는 여기저기에 보였다. 그럼 자동차 진행 방향으로 미아리고개가 나타나야 했다. 노란 흙길이 갑자기 빨딱 솟구친 고갯길. 좁은 길 양쪽으로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빼곡하고 잎을 떨군 칡넝쿨이며 다래넝쿨이 칭칭 감기거나 늘어진 숲, 밤이면 호랑이가 나오는 건 물론, 전쟁 때 죽은 사람들의 뼈에서 비치는 푸른 도깨비불이 한스럽게 오락가락 번득이는 곳이리라. 그래야 내가 알고 있는 노래처럼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고개일 것이다. 호랑이가 나오고 나무숲이 우거진 고개로 철사 줄에 꽁꽁 묶여 끌려가는 남루한 사람들의 참혹함까지 더해진 비극과 절망과 한이 서렸을 무서운 미아리고개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부끄러움과 실망감을 감추고 야박하거나 세련되어 보이는 서울사람들을 붙잡고 “미아리고개가 어딘가유? 얼루 가야 미아리고개래유?” 하고 긴장하며 물었다. 그때의 자괴감과 참담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내가 선 자리의 오른편을 가리키며 “이게 미아리고개”라고, 미아리고개 앞에서 미아리고개를 묻는 나를 멸시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고개 같지도 않은 고개 양편엔 나무가 아니라 집들이 들어차 있고 호랑이가 나오기엔 애초부터 글러 보였다. 내 실망감은 현실을 앞에 두고도 수정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1964년에 미아리고개를 넓혔다는 사실을 내가 어찌 알랴.
청계9가에 재현해 놓은 1960년대 판자촌.
그립고 그리운 어머니의 품속 같은
하여간 고개 같지도 않은 미아리고개를 타박타박 걸어 올라가 개운산 자락의 북측 면에 자리 잡은 서라벌예술대학 건물을 찾아가서도 내 실망과 배신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고개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여겼던 그 당시의 실망스런 미아리고개는 아직도 미아리고개로 불리며 남아 있다. 여전히 비스듬한 경사면을 이룬 언덕을 하고서다. 사람들에겐 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우열감(優劣感)이 있는 것 같다. 서울내기니, 시골뜨기니 하는 것은 물론 ‘사대문 안에서 사느냐 밖에서 사느냐’부터 ‘미아리고개 안쪽에 사느냐 그 바깥쪽에 사느냐’ 등으로. 서울에 살되 미아리고개를 넘어가서 터를 잡았다는 건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했거나 가난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어찌되었건 미아리고개는 내가 처음 발을 디딘 이후로도 몇 차례나 길을 넓히고 언덕을 낮췄다. 미아리고개가 한 많은 민족 전쟁의 상흔을 기억시키는 노랫말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추억하는 사람들도 이젠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아리고개… 내게는 첫 정 같은 소중함으로 여전히 그립고 그리운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공간이고 이름이다. 미아리고개 너머에 산다는 건 고난과 슬픔의 추억이 깃들었으되 삶은 소박하고 따뜻하며 선량하다는, 층층의 자부심을 숨겨놓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미아리고개는, 하나의 ‘사랑’이다!
- 글 이경자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 사진 김영호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