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년을 함께하다
무악재 옆으로는 인왕산이 솟아 있습니다. 이 고개는 모악(母岳), 길마재, 모래재 등 여러 개의 별칭으로 불립니다. 모악은 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가려는 형세를 지닌 삼각산 인수봉의 기세를 막기 위해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산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두 개의 봉우리로 돼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말안장같이 생겼다고 해서 길마재로, 고개 북쪽에 신라시대 사찰인 사현사(沙峴寺)가 있어 모래재로 불렸다고 합니다. 안산 정상에는 조선시대의 봉화 터가 두 군데 있습니다. 이 봉화대에서 위로는 평안도·황해도, 아래로는 부산·회령까지 급보를 전했다고 합니다. 무악재는 조선시대에 의주와 통하는 주요 교통로였고, 지금도 서울 도심과 서대문 외곽을 연결합니다.
<사진>은 1950년대 말 독립문에서 홍제동 쪽으로 바라본 무악재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왕복 6차선의 아스팔트 도로가 깔려 있지만 당시에는 흙길이었네요. 어려웠던 시절을 대변하듯 일을 찾아 고개를 넘어온 지게꾼의 표정에서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사인 무학대사와 함께 이곳에서 광활한 한양 땅을 내려다보고 새로 도읍지로 정했다고 합니다. 무악재 인근은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사신이 이 고개를 넘어 중국으로 조공을 바치러 갔고, 중국 사신도 이 고개를 거쳐 한양으로 들어왔습니다. 중국 사신은 무악재 아래에서 예복을 갈아입었고, 왕은 독립문 자리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사신이 무사히 고개를 넘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리던 사신당도 있었습니다. 사신당 안에는 사신들이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하네요. 이 사신당은 도로를 넓히며 위치를 옮겨 방치됐다가 지금은 은평구 진관내동으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비를 맞으며 이 고개를 넘어 북으로 파천(播遷: 임금이 본궁을 떠나 다른 곳으로 난을 피함)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인조 때는 반란군 이괄이 이곳으로 패주했습니다.
1959년에는 이 고개가 무너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당시 신문기사에 “서대문구 무악재 고개가 무너져 일시 교통이 차단되는 큰 혼란을 일으켰다. 사고의 원인은 3년 전 도로 확장 공사를 한 후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도로 좌우에 돌로 담을 싸두지 않고 방치한 것이 이번에 다시 도로 확장 공사를 하자 벌어진 틈으로 물이 들어가 자연 붕괴된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사진> 1950년대 말 독립문에서 홍제동 쪽으로 바라본 무악재의 모습. 일을 찾아 고개를 넘어온 지게꾼의 표정에서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서울 도심과 서대문 외곽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
한산하던 무악재 도로도 1960년대에 들어서며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갈수록 심한 교통지옥’이라는 제목의 1964년 신문기사에 당시 상황이 잘 설명돼 있습니다. “요즈음 서울 시내에서는 교통지옥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것은 정부가 공무원들의 출근 시간을 9시 30분에서 9시로 당겨 더욱 심해졌다. 서울 시내의 교통인구는 하루 240만 명인데 그 절반인 120만 명이 출근 시간인 아침 7시 30분부터 9시 사이에 각종 차량을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교통지옥 속에 운행하는 차량도 정비가 신통치 않고 버스에 승객을 마구 태워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11월 28일 상오 8시 45분경 서울 문화촌에서 중랑교로 달리던 버스가 무악재에서 뒤집혀 승객 4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72년 동아일보의 ‘한성과 서울’ 기획 기사에 ‘무악재’ 편이 실렸습니다. 이 글에 무악재의 역사가 잘 녹아 있습니다. “이조 오백 년 내내 수도 한성의 제1번 국도 서쪽 첫 고빗길이었던 무악재. 지금으로 하면 어느 산촌의 한적한 고갯길만 같은 이 좁은 길목이 그때에는 관서지방과 멀리 중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으로서 무수한 역사의 발자취가 여기 다져졌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덧없는 변모를 거듭한 무악재. 조국의 산하가 두 동강 난 서글픈 현실 앞에서 지금은 한 덩이 조국을 바라는 절실한 염원이 북으로 향해 자꾸만 줄달음치고 있는 이 길목엔 통일로로 이어지는 수도 서울의 서부방사간선이 폭넓게 트였다.”
1960년 10월, 인왕산과 안산 사이의 고개인 무악재 주변 풍경.
- 사진 고(故)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 글 김구철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
※ 지난 9월 7일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가 별세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