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소리를 찾아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류이치 사카모토의 삶과 음악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카모토는 동일본대지진 당시 쓰나미에 휩쓸리고도 살아남은 피아노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미야기현 농업고교를 찾는다. “어떤 소리를 낼지 궁금했다.” 나무는 뒤틀리고 휘었고, 몇몇 건반은 주저앉아버렸고, 몇몇 현은 아예 끊어졌다. 사카모토는 피아노를 위로하듯 부드러운 손길로 연주한다.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이지만 어딘지 낯설다. 몇몇 소리를 잃어버린 데다 몇몇 소리는 틀어졌기 때문이다.
사카모토는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일반적인 피아노 소리야말로 인간이 억지로 조율한 부자연스러운 상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듣는 피아노 소리는 인위적으로 만든 부자연스러운 소리라는 얘기다. 그는 ‘쓰나미 피아노’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소리를 낸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억지로 조율한 것을 쓰나미 물결이 자연 상태로 되돌려놓았다는 것이다. 자연의 소리를 좇는 행보는 지난해 발표한 스튜디오 앨범 <async>에서도 드러난다. 빗소리, 바람소리, 나뭇잎 밟는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닮으려는 음악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2014년 후두암 판정을 받고 활동을 중단했다 복귀한 이후, 그의 음악관은 또 한 차례 진화했다. 그 방향이 자연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서울 중구 퇴계로6가길 문화공간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는 <류이치 사카모토: 라이프, 라이프>전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사카모토가 일본 야마구치 정보예술센터(YCMA)와 협업해만든 <water state 1>은 첨단 기술로 자연을 표현한 작품이다. 6m 높이에 매달린 324개 노즐에서 치밀한 제어를 거쳐 떨어지는 물방울은 잔잔한 수면에 동심원과 파동을 만들어내고, 이는 사카모토의 사운드와 결합된다. 물의 움직임과 사운드는 하나가 되어 비, 바람, 태풍 등 자연 현상을 표현한다. 공중에 매달린 3개의 수조를 아래에서 올려다봐야 하는 작품 <LIFE - fluid, invisible, inaudible…>은 파동과 물안개와 빛과 소리가 맞물리면서 하늘도 되었다 바다도 되었다 하는 식이다.
1 류이치 사카모토.
2 문화공간 피크닉 전경
개발만능주의의 역발상
전시도 인상적이었지만, 전시회가 열리는 피크닉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피크닉은 지난 5월 26일 사카모토 특별전을 시작하면서 개관했다. 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남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에 위치한 이곳을 찾아가면서 적잖이 놀랐다. 낡고 오래된 주택가 사이에 전시공간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전시장 외관이 주변 환경과 이질감 없는 오래된 건물이라는 점도 놀라웠다. 이곳은 1960년대 후반 지어진 제약회사 사옥이었다고 한다. 50년 된 건물이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피크닉은 이번 사카모토 특별전을 기획한 전시기획사 글린트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2013년 유럽 재즈 레이블 ECM 특별전을 성공시키면서 이름을 알린 글린트는 2014년 <즐거운 나의 집>전을 연 뒤 특별한 계획을 품기 시작했다. 독자적 공간을 마련해 색깔 있는 전시를 꾸준히 해보고 싶다는 게 김범상 글린트 대표의 생각이었다. 서울 후암동, 만리동 등을 돌아보며 작은 공간을 찾던 중 한 제약회사가 사옥을 내놨다는 소식을 들었다. 찾아가보고는 여기구나 싶었다.
건물을 마련하고 나니 여유자금이 많지 않았다. 투박해도 그 자체로 느낌과 색깔을 살릴 수 있도록 건물을 최대한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모던하고 세련된 전시공간으로 리모델링해나갔다. 1층엔 카페와 아트숍, 3층엔 미슐랭 가이드에도 오른, 이충후 셰프의 레스토랑 제로컴플렉스를 유치했다. 전시장 앞에는 온실을 꾸몄다. 이곳에서 박미영 농부가 재배하는 식재료들은 제로컴플렉스를 비롯해 여러 레스토랑에 공급된다. 4층 옥상은 라운지와 전망대로 꾸몄다. 서울 도심과 남산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피크닉은 요즘 젊은 트렌드세터들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사카모토 특별전뿐 아니라 공간 자체를 좋아하는 이들이SNS에 올린 사진들이 퍼지면서다. 낙후된 도심 속 오래된 건물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세련된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 새로운 트렌드가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종로구 익선동, 중구 을지로, 영등포구 문래동 등 서울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지고 있다. 낡은 것을 때려 부수고 높고 화려한 새 건물을 지어 올리려고만 하는 개발만능주의를 뒤집은 역발상이 되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셈이다.
피크닉 주변에는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창고나 작은 임가공 회사들이 많다. 오랜 세월 방치된 작고 낡은 건물들이 눈에 많이 띄어 시간이 멎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런 곳을 확 밀어버리고 재개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다. 고유 색깔은 살리면서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게 자연의 법칙에 맞게 서울의 숨통을 이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김범상 글린트 대표는 “이 지역이 갑자기 개발되면서 주민들이 떠나야 하는 상황은 결코 바라지 않는다. 기회가 된다면 주민들과 상생하면서 지역을 재생해나가는 프로젝트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전 종영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낡은 건물에 ‘경축 안전진단 통과’라는 현수막이 붙은 걸 보고 “안전하다는 판정을 받아서 좋아하는 거구나”라고 누군가가 얘기하니 다른 누군가가 대꾸한다. “안전하지 못해서 재건축해야 한다는 뜻이야. 건물을 없애야 한다는 걸 축하하다니 참 이상하지.” 내가 사는 곳이 더는 이상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 글 서정민 한겨레 기자
- 사진 제공 글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