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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7월호

국회의사당의 역사대한민국 정치 역사를 담다
한강을 배경으로 한 지금의 국회의사당은 서울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이지만, 여의도에 자리 잡기 전까지 전국을 전전하며 부침을 겪었습니다. 과거의 국회의사당은 최신 설비를 갖춘 지금의 국회의사당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지만, 의견 충돌로 고성이 오가는 모습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1959년 제4대 국회의원들이 회의하는 모습.

<사진> 1959년 제4대 국회의원들이 회의하는 모습.

지금의 국회의사당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은 6·25전쟁을 겪으며 서울에서 부산으로, 대구로, 다시 서울을 거치며 여러 공간을 사용했습니다. 제헌국회가 개원한 1948년, 서울 세종로 중앙청 중앙홀이 첫 의사당으로 사용됐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임시 수도였던 대구의 문화극장이 의사당이 됐습니다. 이후 전세가 악화되자 정부와 함께 국회도 부산으로 이동해 부산문화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했습니다. 서울이 수복되고, 정부가 서울로 돌아오자 국회도 다시 중앙홀에 자리 잡았다가 1950년 말부터 1951년 초까지 서울 태평로 부민관(府民館) 건물을 의사당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1·4후퇴로 정부가 다시 부산으로 남하하며 부산극장이 의사당이 됐고, 1951년 6월부터 1953년 8월 서울 환도 때까지 경상남도청 무덕전이 의사당 역할을 했습니다. 서울로 환도한 국회는 1953년 9월부터 제2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난 1954년 5월까지 중앙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다가 그해 6월 제3대 국회가 개원하며 부민관을 수리해 의사당을 만들었고 1975년 9월까지 사용했습니다. 양원제가 실시된 제5대 국회 때 참의원은 서울시청 뒤 대한공론사로 옮겨갔고요. 현재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1968년 제7대 국회에서 부지를 선정한 후 1969년 제헌절을 맞아 기공식을열었습니다. 그러고는 1975년 8월 15일 완공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립극장인 부민관은 8·15광복 후 미군이 접수해 사용하다가 1949년 서울시의 소유가 됐고, 1950년 국립극단이 창단하며 국립극장으로 지정됐지만 바로 6·25전쟁이 터져 극장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건물은 그해 서울 수복 뒤 국회의사당으로 임시 사용됐고, 수리 후 1954년 6월 9일 정식 의사당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이날 신문 기사에는 새 의사당을 여는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4년간 우리 살림살이의 역군으로 선출된 230명의 선량들은 이미 수속 절차를 마치고 오늘 개최되는 국회에 ‘데뷔’한다. 깨끗이 단장된 새 의사당에서 회합하게 되는 새 선량들의 기분도 좋으려니와 국민 또한 동 의사당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입법하여주기를 선량들에게 고대하고 있다. 개회를 앞두고 서울로 몰려든 시골 출신 의원들은 벌써부터 사무처에 와서 찝차 대여증, 무임승차권, 아파트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하는데 좋지 못한 버릇이 생김에 아연함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은 노련한 사무처 직원들이라고. 국회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클수록 양심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여주겠다는 선량들의 의욕과 신념만이 있어야 할 일이다.”

국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승만 정부는 당시 남산에 새 국회의사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1958년 신축 현상설계 공모전을 열어 24층 규모의 의원회관을 포함한 의사당을 짓기로 했습니다. 1959년 5월 15일 2만 7,000평 대지에 자리 잡은 남산 국회의사당 신축지에서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공식 축사에서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건축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애국심을 묶어서 우방에 자랑이 되고 후세에 복이 될 수 있도록 이날을 축하한다”며 “조망과 경치가 좋은 이곳에 국회의사당이 들어서면 국회가 더욱 잘될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며 국회가 해산됐고,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 계획도 백지화됐습니다. <사진>은 1959년 제4대 국회의원들이 의사당으로 쓰이던 건물 본회의장에서 회의하는 모습입니다. 지금은 널찍한 본회의에 고급 탁자와 의자, 컴퓨터 등이 설치돼 있지만 당시 의원들은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앉았습니다. 에어컨도 없을 때라 한 의원이 여름의 무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부채질을 하고 있습니다. 여야 의원들이 가까이 앉아 있어 소통은 잘됐을 듯싶은데 그때도 지금처럼 의견이 충돌하며 고성이 오가고 시끄러웠습니다

사진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글 김구철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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