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작 낮잠
* <10분 희곡 릴레이>는 젊은 작가 혹은 지망생들의 재기발랄한 10분 단막극입니다.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人에 가시면 더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webzine.e-st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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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남편, 아내
무대 부부의 집, 거실
빗소리 들려온다. 남편, 제사상을 차리고 있다.
아내, 방에서 나온다.
- 아내
- 여보.
- 남편
- 잘 잤어?
아내, 잠이 덜 깬 얼굴로 소파에 앉아 가만히 남편을 바라본다.
- 아내
- 뭐해?
- 남편
- 전이 죄다 으스러져.
- 아내
- 부침가루 썼어?
- 남편
- …아.
- 아내
- (웃는) 그러니까 그래.
- 남편
- 그냥 계란물 입히면 되는 건 줄 알았어.
- 아내
- 깜박 잠들었네. (다가와 앉는) 누구 제사야?
- 남편
- …응.
- 아내
- 누군데? 해도 안 졌는데 제사상을 벌써 차려. (음식 뒤적이는) 당신 혼자 이걸 다 차렸어? 나한테 말하지 않고….
- 남편
- 혼자 할 수 있으니까.
- 아내
- 놀랍네. 라면 물도 못 맞추는 사람이.
아내, 거실을 서성인다.
- 아내
- 이상해.
- 남편
- (제기 위치를 바꾸어보는) 뭐가?
- 아내
- 여기 말이야. 뭔가… 낯설어.
- 남편
- 커튼을 바꿔서 그래.
- 아내
- (커튼 만져보는) 당신이 바꿨어? (사이) 여기 있던 꽃병은 어디 갔어?
- 남편
- 깨져서 버렸어.
- 아내
- (놀라는) 언제? (커튼 걷는) 커튼도 안 걷고.
- 남편
- 당신 자는 동안.
아내, 남편의 옆에 앉는다.
자신을 보지 않는 남편의 얼굴을 붙잡는다.
- 아내
- 울어?
- 남편
- (빼내며) 울긴 누가 울어.
- 아내
- 낯설어… 당신도.
- 남편
- 낮잠 자서 그래.
- 아내
- 낮잠…. 낮잠을 잤던가 내가. 이상해. 언제 잠이 든 거지? (혼란스러운) 왜 이렇게 많이 잔 거야?
- 남편
- 원래 잠이 많아, 당신. (일어서는) 두 시야.
- 아내
- (투정 부리듯) 억울해. 하루가 짧아진 기분이야. (사과 들며) 사과는 꽁지를 따야지.
- 남편
- 여보.
- 아내
- 배도 그렇고….
- 남편
- 미안해.
사이. 남편, 창문을 열고 담배를 문다.
- 아내
- 왜 그래?
- 남편
- 윤 작가 만났어.
- 아내
- 오늘? 그러고 보니 당신, 오늘 세 시에 첫 공연 아니야? (벌떡 일어서는) 맞잖아. 첫공에 연출이 빠지면 어떡해. (시계 보는) 곧 시작하겠어.
- 남편
- 윤 작가랑 작품 들어가기로 했어. 대본이 너무 좋더라. 이렇게 좋은 작품을 나한테 맡겨줘서 고맙다고 했어. 그랬더니 울더라. 윤 작가가 울었어.
- 아내
- 무슨 소리야? 지금 작품, 그 작가님이랑 하는 거잖아.
- 남편
- 윤 작가 말이야. 어려도 속이 깊잖아. 정도 많고. 나를 많이 걱정했다더라. 내가 자기 우상이었대. (웃는) 평소 같았으면 헛소리 말라고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우니까…. 울면서 그런 소릴하니까. 간지러운 거 꾹 참고 물었어. 1년 전에 내가 네 작품 맡아놓고 공연 첫날 도망쳤는데, 그래도 내가 우상이냐고. 우상 삼을게 없어서 이런 무책임한 연출을 삼냐고. 난 그냥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윤 작가가 그러대. 그래서 우상이었다고. 내가 하는 연극은 항상 인간다웠고… 그래서 중심엔 사랑이 있었고… 그러니까 그날은… 내 세계가 무너진 거라고. 내가 잠적한 1년이, 자기는 마땅하다고 생각했대. (사이, 웃는) 그래, 내가 졌다! 그랬어. 이거야말로 진짜 웃기는 소리지.
- 아내
- 여보. 나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다가가는) 이상해. 당신이 낯설어.
- 남편
- (담배 끄는) 당신은 매일 한 시 오십칠 분에 일어나. 잠드는 시간은 보통 네 시 반. 가끔은 오십 분. 운이 나쁘면 일어난 지 한 시간 만에 잠들 때도 있어.
- 아내
- 뭐?
- 남편
- 다만 일 년 내내 같은 건, 당신은 언제나 울며 잠이 든다는 거야. 환한 낮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을 하고 나에게 말하지. ‘안녕, 여보.’ 그러면 나는 당신보다 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어. ‘일어나, 여보!’
- 아내
-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붙잡는다.)
- 남편
- 눈 감은 당신을 붙잡고 나는 엉엉 울다가, 일어나라고 뺨을 쳤다가, 미안하다고 부은 당신 볼을 붙잡고 다시 울었어. (사이) 그렇게 일 년을 보냈어.
- 아내
- 그만해, 여보. 나 머리가 너무 아파.(바닥에 주저앉는다. 상에 차려진 제사 음식들을 본다.) 오늘 누구 제사야?
- 남편
- …….
- 아내
- 어머님 제사는 겨울이고, 아버님은 정정하신데. (원망스럽게 보는) 왜 상을 차렸어?
- 남편
- 여보.
아내, 불현듯 남편에게 달려간다.
- 아내
-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여보.
- 남편
- (괴로운)
- 아내
- 당신이 말하면, 나 잠이 드는 거지? 당신이 나를 재우는 거지?
- 남편
- (동시에, 따라 읊는) 당신이 나를 재우는 거지?
- 아내
- (혼란스럽게 보면)
- 남편
- 일 년이나 연극을 했어. 당신이랑 나랑, 이 대본을 가지고. 어떻게든 결말을 바꾸려고 했어. 당신이 잠들지 못하게 하려고 난 매일을 일 년 전 그날에 살았어. 깨진 꽃병과 똑같은 꽃병을 사서 뒀고, 바뀐 계절을 보지 못하게 매일 커튼을 쳤어. 잠든 당신의 손톱을 자르고, 당신이 입고 잠든 옷과 똑같은 옷을 몇 벌씩 사뒀어. 당신이 일어나는 한 시 오십칠 분만 되면 난… 언제나 같은 옷을 입고 여기 앉아 있었어. (사이) 하지만 결말은 한 번도 바뀌는 적이 없어.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깨달았어. 모든 걸 깨달은 순간, 내게 사과를 하며 스스로 잠이 들었지. 내가 당신을 재웠다고? 아니, 난 당신을 한순간도 잠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을 재우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고. 날 떠나는 건 언제나…! 아내 나한테… 어제도 이 말을 했었어?
- 아내
- 나한테… 어제도 이 말을 했었어?
- 남편
- …….
- 아내
- 어제도 똑같은 말을 했어?
- 남편
- (외면하며) 오늘, 당신이 떠난 지 일 년째 되는 날이야.
- 아내
- 그런데 왜 내가 아직도 여기 있어?
- 남편
- …….
- 아내
- 왜 나를 보내지 않았어?
- 남편
- …내가 …항상 여기까지였으니까. (보며) 언제나 당신을 보낼 수 없었으니까. 다음 대사를 말할 수 없었으니까. 여기서 늘 그만뒀으니까. 이 이상은 도저히….
아내, 웃는다.
- 아내
- 그랬구나.
- 남편
- 여보.
- 아내
- 나 전부 기억해.
- 남편
- …무서워, 여보.
- 아내
- 당신은 기억해? 내가 당신한테 고백했던 날, 당신이 나한테 키우던 강아지 얘기를 했어. 아주 어릴 때, 반 년 정도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버렸을 때… 그때 당신이 한 달을 굶었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따라 죽으려고 했다고. 사랑하는 건 고통이라고. 소중한 무언가가 생기는 게,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라고. (사이) 미안해, 여보. 그때 당신에게 무슨 겁이 그렇게 많냐고 핀잔 준 거. 도망치는 당신을 붙잡아 내 옆에 둔 거. 그게 너무 미안해.
- 남편
- 알아. 당신이… 그게 맘에 걸려 나를 찾아온 거. 나를 위해 삼백 번이 넘도록 낮잠에서 깨어준 거.
- 아내
- 이제 괜찮을 거야. (남편 어루만지는) 많이 컸어, 당신. 나를 보낼 수 있을 만큼.
- 남편
- (아주 힘겨운 듯, 그러나 또렷하게) 미안해.
- 아내
- 수고했어, 여보.
두 사람, 마주 보고 웃는다.
- 아내
- 드디어 결말을 바꿨네.
빗소리 커졌다가, 이내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