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COLUMN

11월호

배해률 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분 희곡 릴레이 관련 이미지

* <10분 희곡 릴레이>는 젊은 작가 혹은 지망생들의 재기발랄한 10분 단막극입니다.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人에 가시면 더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webzine.e-stc.or.kr)


등장인물
남자(25세)
여자(35세) 남자의 10년 후
무대 원형 탁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 의자 두 개가 마주하고 있다. 시계가 의자 뒤쪽으로 각각 하나씩 걸려 있다. 이 시계는 서로 다른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



막이 오른다. 두 명의 등장인물은 모두 같은 모양의 코트를 입고 있다. 남자가 왼쪽, 여자가 오른쪽 의자에 앉아 있다. 남자와 여자가 각자의 뒤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곤 이내 서로를 바라본다. 원형 탁자 위에는 푸른색 물약이 담긴 병, 두 개가 놓여 있다.

남자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여자
나는 먹을 거야.
남자
그러면?
여자
그러면 모든 게 끝나, 마침내.
남자
그걸 왜 하필 나한테 얘기하는 거야?
여자
우리니까, 그리고… 너도 먹었으면 해.
남자
너는 정말 이기적이다.
여자
어떤 면이?
남자
나도 네가 될 기회가 필요해.
여자
내가 그걸 기회라고 했구나.
남자
기억은 하는구나.
여자
그럼… 어쩌면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남자
무슨 말이야?
여자
가장 아름다울 때, 너로서 기억되고 싶을 뿐이야.
남자
나는 아름답지 않아, 그러기를 꿈꾸고 있을 뿐이지.

여자, 코트 안 쪽 가슴팍에서 메스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는다.

여자
자, 이걸 봐.
남자
나는 나약하지 않아.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
여자
거 봐, 자만하고 있잖아.
남자
누워서 침 뱉기라고 하지.
여자
이건 의사 손에 들려 있던 게 아니야.
남자
…….
여자
너를 사랑하던, 나를 사랑했던… 그 사람들 중 하나. 그의 손에 들려 있었지.
남자
누군지 말해줄 수는 없어?
여자
딱 집어서 말할 수 있을까? (사이) 무섭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남자
불을 켜고 거울을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참을 수 있을 거야.
여자
미안해.
남자
왜?

여자, 코트 안쪽 가슴팍에서 깨진 손거울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남자
왜.
여자
볼 수 없어.
남자
(코트 안쪽에 손을 넣으며) 나한테도 있어, 내 거울을 줄게.
여자
꺼내지 마. 그럴 필요 없어. 그 거울도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깨지고 말 거야.
남자
해보기나 해.
여자
아니! 네가 내가 된다고 해서 결코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아니야.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남자
(코트 안쪽에서 손을 빼고) 그게 왜 다르다는 거야!
여자
힘들지?
남자
그래, 네가 나를 힘들게 해.
여자
지금은 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네가 너를 힘들게 할 거야. 이 칼을 쥔 사람도 마주할 거고… 보기만 해도 깨져버리는 거울도 마주하겠지.
남자
치사하다, 넌.
여자
뭘?
남자
아무리 나지만 네가 모든 걸 다 보여주지 않았다는 거. 그거 하나만큼은 나도 분명히 알고 있어.
여자
…….
남자
보여줘.
여자
실망할 거야.
남자
그건 내가 판단할게.

여자, 코트 바깥쪽 주머니에서 축 늘어진 꽃 한 송이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여자
내가 된 그날, 길에서 꺾었어.

남자, 꽃을 들어 향을 맡는다.

남자
거 봐. 있잖아.
여자
하지만 향기는 점점 옅어지고 있어.
남자
너한텐 옅어진 향기지만, 나는 처음 맡아보는걸. 굉장해.

사이.

여자
먹지 않을 거구나.
남자
꽃 한 송이면 충분한걸… 슬퍼?
여자
슬프다기보단… 아쉽네.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
남자
하지만… 너는 먹을 거지.
여자
그래.
남자
우린 서로를 막을 수 없을 거야.
여자
그래.

사이.

여자
그런데도… 괜찮아?
남자
슬프네. 하지만….
여자
하지만?
남자
하지만 나는 네가 되어야 해.

여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도 그녀에게 응답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여자, 탁자 위에 놓인 물약 하나를 가져간다.

여자
(잠시 물약을 바라보곤) 먹기 전에 한 마디만 더 해도 될까?
남자
소용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가 될 거야.
여자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남자
해 봐.
여자
… 무서울 거야. 힘을 내.
남자
어…고마워.

여자, 물약을 들이켠다. 빈 병을 탁자 한쪽에 올려놓는 그녀.

남자
(다급하게) 남은 약 하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여자
네가 갖고 있다가… 비로소 내가 되었을 때… 그때, 너도 선택해.
남자
기회를 주는구나.
여자
응. 너는 분명 이 약을 들이켜겠지… 우리니까. 하지만….
남자
하지만?
여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기를 빌게.
남자
잊지 않을게.
여자
잊지 않을게.문화+서울
그림 손민정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