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의 서커스 유학
원래 배우가 되는 꿈을 갖고 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2000년 극단 입체에서 연극을 시작했는데, 그때 공연 작품이 아비뇽 오프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다양한 공연을 접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을 속이고 프랑스로 향했다.
6개월 정도 어학원을 다닌 후 리옹 시에 위치한 작은 연극학교(LaSc ne sur Sa ne)에 들어갔다. 연기에 대한 기초 트레이닝도 받았지만, 언어의 장벽이 높았기 때문인지 몸으로 하는 수업이 더 좋았다. 그때 ‘움직임’이라는 것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 나는 서커스학교(L’ colede Cirque de Lyon)의 아크로바틱 취미반에서 서커스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했다. 수업에 열심히 임하는 내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정식으로 서커스 교육을 받아보라고 제안했고, 한번은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치른 샤텔르호 국립서커스학교(Ecole Nationale de Cirque de Ch tellerault) 입학 시험에 덜컥 합격해버렸다.
샤텔르호 국립서커스학교에서 1년간 핸드스탠드, 핸드밸런싱, 트램펄린, 줄타기, 밧줄, 차이니즈폴, 연기, 무용 등 서커스 기초 교육과정을 이수한 나는 연이어 마르세유에 위치한 아크로바틱연극학교(l’Ecole du th tre acrobatique de marseille)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아크로바틱, 연기, 무용, 음악 등에 대해 더욱 심층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핸드밸런싱(물구나무서기)을 전공하기 위해 들어간 우크라이나 키예프국립서커스예술아카데미(Kiev State Academy of Circus and Variety Art)에서는 1년간 오로지 물구나무서기만 했다. 그리고 또 다시 입학 시험을 치러 들어간 곳이 르리도-툴루즈 시립서커스예술학교(le Lido, centre municipal des arts du cirque toulouse)다. 전 세계의 서커스 학도들이 모여드는 유명한 학교인데,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말 그대로 그곳에서 살았다. 심도 있고 빡빡한 교육과정 때문에 동기생 모두 감정의 기복이 심했고 항상 예민했지만 그때가 그리울 때가 종종 있다. 그곳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으며 스스로를 다듬어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무용 vs 광대
이렇게 보니 남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 많은 학교를 다닌 것 같다. 충분한 준비 과정을 거친 후 사회에 나가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있는 집 자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10년간의 프랑스 생활은 그야말로 곤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무언가가 더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르리도-툴루즈 시립서커스예술학교에서 연수를 마친 내게 두 가지 기회가 찾아왔다. 선택지는 무용수와 광대였다. 학교에서 워크숍을 했던 광대 강사가 공연 창작 작업을 제안했는데 결국 무용을 선택했고, 쿠빌라이 칸 인베스티게이션즈(Kubilai Khan Investigations) 현대무용단에 들어갔다. 서커스를 시작할 때부터 동경하던 무용단이었기에 그곳에서의 작업은 꿈만 같았다. 물론 창작은 힘들고 고독한 작업이었지만, ‘2008 리옹댄스비엔날레’라는 큰 무대에 설수 있었던 것을 비롯해 내게는 정말 천금 같은 시간이었다.
이후 안무가 라씨드 우람단(Rachid Ouramdane)의 신작에 참여하며 ‘파리가을축제’ ‘아테네페스티벌’ ‘2009 아비뇽페스티벌 IN’ 등 여러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기도 했고,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시디 라흐비셰르카위(Sidi Larbi Cherkaoui)의 이스트맨(Eastman) 무용단 공연창작에도 참여했다.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도중에 한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이 세 무용단에서의 경험은 귀중한 자산으로 남았고, 당시 만난 안무가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스무 살 열정으로의 회귀, 그리고 돌아온 서커스
수블리미나티 코퍼레이션(Subliminati Corporation)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수블리미나티 코퍼레이션은 르리도-툴루즈 시립서커스예술학교 동기생들과 뜻을 모아 결성한 공연단이다. 국적도, 전공도 다양한 우리는 광대적인 공통의 코드를 갖고 있었고 현대사회의 터부에 대한 고민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것을 공연 안에서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직설적으로 풀어냈다. 앞으로의 작업이 기대되는 단체였지만, 아쉽게도 잦은 부상으로 1년여 만에 컴퍼니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2012년부터는 극단 간다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학로에서 연출가로 명성을 날리는 민준호 대표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희준 선배님, 김민재 선배님 등 믿음직한 형님들과 쟁쟁한 후배들 사이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3년간 극단에 있으면서 아카펠라뮤지컬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연극 <올모스트 메인> <유도소년> 등을 작업했고 현재는 연극 <남산에서 길을 잃다> <가족입니다> <춘천, 거기>등 외부 작업도 하고 있다. 예전처럼 몸을 못쓰게 되자 오히려 스무 살때의 열정을 되찾은 것 같다.
요즘에는 아무도 모르게 공연을 하나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오면서 서커스는 이제 끝이라고 마음먹었는데, 올해 초 업계에서 어떻게든 버티겠다는 마음으로 기획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서울문화재단 서울무용센터에서 진행하는 ‘유망예술지원사업 닻(DOT)’에 선정된 것이다. 차이니즈폴, 타이트와이어, 밧줄, 아크로바틱, 핸드투핸드 같은 서커스 요소가 결합된 ‘서커스-댄스시어터’ 장르의 공연을 올해 말선보일 계획이다. 배우, 무용수, 파쿠르 출신의 단원들이 3개월 전부터 서커스 트레이닝을 받았고, 나는 ‘완브라더스’라는 활동명으로 안무와 연출을 맡았다. 혼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버겁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서커스, 무용, 연극, 그리고…
사실 지금의 나는 서커스 아티스트가 아니다. 2012년 봄부터 내 신체를 이용한 서커스를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한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고. 사실 내가 서커스를 시작하게 된 것은 통합적인 교육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서커스뿐만 아니라 연극, 무용,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접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덕분이다. 장르 간의 혼합 혹은 파괴를 통해 신선한 장르에 도전하는 것이 즐거웠다. 특히 신체를 이용한 장르의 확장에 끌렸고, 그래서 열심히 했을 뿐이다. 뭔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타이틀 아래 스스로를 가두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고 싶다.
- 글·사진 윤여진(완브라더스)
- 툴루즈시립서커스학교(2006~2008) 출신, 전 Subliminati Corporation 창단멤버. 프랑스 및 벨기에에서 Frank Micheletti, Rachid Ouramdane, Sidi Larbi Cherkaoui 안무가들과 작업했다. 2012년부터 극단 간다 소속 배우로 활동 중이다. 서울문화재단 거리예술창작센터 ‘서커스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Jumping Up’ 기초 및 심화과정에 강사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