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로 들어가니, 그가 몇 년간 그려왔던 크고 작은 그림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바닥엔 최근까지 작업을 이어온 것으로 보이는 물감과 재료들이 널브러져 있다. 정리가 안 된 모양새에서 작업하면서 느꼈을 고민이 전해진다. 그의 그림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미술 작품들과 조금 다르다.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붓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대신 손을 이용하고 때로는 온몸을 캔버스에 던지기도 한다. 그의 최근 활동은 미술계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방송에서도 주목했고, 최근 경매에서 적지 않은 가격으로 거래도 됐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은 것일까. 세계적인 미술 축제에 초청받았다. 유럽 최대의 페스티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말이다.
경기도 장흥에 위치한 권지안 작가의 작업실인 ‘빌라빌라콜라’의 입구에는 퍼포먼스에 사용됐던 재료로 만든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음악 하는 솔비와 미술 하는 권지안
음악에서 정상을 찍었는데, 미술로 전향했다. ‘전향했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음악보다 미술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인사동에서 막을 내린 개인전 <Real Reality; 불편한 진실>은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람했다. 작품은 추상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작가가 어떻게 느꼈을지 짐작하게 되는 작품. 그는 그림을 설명하면서 ‘치유’를 언급했다. 그에게 치유를 받아야 할 만큼의 아픔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그가 아픔을 고백했다. 2009년 온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동영상 사건. 한참이 지난 후 허위임이 드러났고, 동영상을 유포한 자는 체포됐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2년 동안 당사자는 죽지 못해 사는 심정이었으리라. 정상을 달리던 스타는 방송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입은 정신적 충격으로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다는 그에게 삶은 존재 이유마저 희미해졌다.
“2009년 어느 날 매니저가 동영상을 전해줬어요. 처음엔 가볍게 넘겼죠.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메신저를 통해서 퍼지더라고요. 제 의지랑 상관없이. 엄마는 물론 가족, 친구들까지 다 봤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진위 여부를 확인도 안 하고 기사가 터졌어요. 단정 짓는 것처럼 말이죠. 엄청나게 이슈가 됐어요.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퍼졌어요. 주변에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는데, ‘네가 나서면 더 확산되니까 나서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동영상의 당사자에게도 피해가 갈까 봐 더 이상 이슈를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 있다가 경찰에서 회사로 연락이 왔어요. 조치를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연락을 했대요. 그래서 고소를 하게 됐죠. 유포한 자들을 다 잡았는데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더라고요. 심지어 고등학생까지….”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몰려온다. 당시엔 개인적인 일까지 불행이 겹쳤다. 심지어 집에 도둑이 들어서 다 털리기도 했다. 게다가 소속사가 바뀌는 시기였는데 새로 옮긴 곳마저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정신없이 지낸 2009년을 뒤로하니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5살부터 연예인을 꿈꾸며 살아왔고 연습생 시절을 거쳐 20대 초반에 그 꿈을 이뤘는데…. 과연 이게 뭔가?’라는 좌절감을 느꼈다. ‘내가 생각한 꿈이 이게 맞나?’라는 자괴감마저.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정신적으로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쓰나미같이 밀려오는 불행은 그가 감당하기에 벅찼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당시의 정신적 충격은 심리 상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누군가 “심리치료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피아노를 비롯해 꽃꽂이, 기타 등으로 하루를 1분의 쉬는 시간도 없이 다 채웠다. 피아노를 가르치던 선생님께 물었다. 미술을 배우고 싶은데 그림 그리는 분들 중에 아시는 분이 있냐고. 선생님의 친동생이 미술 선생님이란다. 초등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지체할 것도 없이 다음날 바로 소개받았다. 선생님은 그를 진심으로 대했다. 그에게 왜 이걸 배우고 싶은지 이유를 고백했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거 같았다. 언젠가 책 한 권과 스케치북을 사가지고 왔다. 무언가를 건네주며 똑같이 그려보라고 시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틈 날 때마다 똑같이 그려보란다. 그런데 그와 그림을 그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힐링이었다. “세상에 내편이 단 한 명도 없을 거 같았는데 그는 내 편이었어요.”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선생님의 연애했던 시간과 결혼하는 순간도 지켜볼 정도로. 언젠가 데생이 지루해져 물감으로 그려보고 싶다고 전했다. 선생님은 색을 쓰는 법을 알려줬다. 마음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이끌어냈다.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를 글로 써보세요. 그리고 그것을 일기처럼 그림으로 그려보세요.”
2010년 미술을 시작했고, 2015년엔 음악을 캔버스에 그리는 ‘셀프 컬래버레이션’ 시리즈를 선보였다. ‘음악 하는 솔비와 미술 하는 권지안의 만남’. 미술에 점점 빠지면서 권지안의 작업 세계가 궁금해졌다. 그는 한동안 미술에 몰입하면서 더 깊은 욕구를 쏟아냈다. 미술 서적도 뒤졌고, 미술사도 공부했다. 그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선생님은 일러스트를 알려줬다. 지금의 권지안을 만들어준 ‘추상’과 ‘현대미술’의 개념이 자리 잡히는 순간이다. 어느 날 영화계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 갔다가 현재 소속사 대표를 만났다. 당시 가나아트센터에서 미술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전문가였기에 그를 붙잡고 많은 것을 물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라붙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대하던 소속사 대표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삶과 일치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려보는 게 어떠니?”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삶을 고민했다. 삶이 뭘까? 어렵게 고민해서 그에게 건넸다. “어려서부터 무대에 서는 게 제 일이었어요.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어요.” “그거 재미있겠네. 어떤 방식으로 해볼까?” 몇 번의 안무를 짜고 오랫동안 연습했다. 그동안 죽을힘을 다한 동작이 한 번의 무대로 사라지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이렇게 날려버릴 바에는 연습한 것을 캔버스에 흔적으로 남기자 다짐했다.
2017년부터 최근까지의 작품들을 모아 전시를 열었다. SNS를 통해서 알려진 우리 사회의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들이다. 그동안 그렸던 70여 점을 모았다. 시리즈는 <레드>(RED), <블루>(BLUE), <바이올렛>(VIOLET)으로 이어진다. 먼저 2017년에 선보인 <레드>부터 소개하자면, 이는 상처받는 여성의 삶을 대변한다. 아마도 그가 여성으로서 겪었던 수치와 상처에 관한 이야기인듯싶다. 이듬해 선보인 <블루>는 계급사회와 사회계층 간의 불평등을 표현한다. 퍼포먼스엔 슈트가 등장하는데, 이는 자신의 계급을 높이고 싶은 현대인의 욕망을 드러낸 오브제다. 하지만 보이는 외적인 것이 정말로 중요한가를 되묻는다. 실제로 퍼포먼스에 사용된 노래 <클라스 업>의 가사엔 ‘meaningless’(의미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시리즈를 마감하는 <바이올렛>은 아름답게 포장된 사랑의 이면이다. 이별의 흔적인 ‘멍’의 색깔을 나타내는 아픔. 결국 그가 받았던 상처를 표현한 것이다.
2017년 5월, KBS <뮤직뱅크>에서 이 퍼포먼스를 라이브로 공개해 화제가 됐다. 원래는 가나아트센터에서 언론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쇼케이스 작품이었는데 이것이 방송으로 발전한 것이다. 생방송 직전에 PD와 상의했는데, 지금껏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는 파격이 두려웠다. 하지만 PD는 그를 믿어줬다. 나중에는 타 방송사의 음악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왜 안 해주냐?”라는 볼멘소리까지 들었다. 생방송이 나간 후 큰 이슈가 됐다. 실시간 검색어의 상위권을 휩쓸었고, 방송 조회 수가 무려 30만을 넘기며 댓글도 넘쳐났다. “충격이다”, “왜 애들 보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걸 하냐?”라는 댓글도 있었다. 나중에 PD에게 괜찮은지 물으니 “정 안 되면 잘리지 뭐”라며 안심시켜줬다. 당시엔 그만큼 심각했다. 그러나 초반의 부정적인 분위기가 반전됐다. 아이돌 후배도 “음악방송에 변화가 필요했는데 선배가 해줬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성의 상처를 주제로 한 <하이퍼리즘 레드>.
미술로 치유한 아픔
음악은 예명인 ‘솔비’로, 미술은 본명인 ‘권지안’으로 활동한다. 세상에 알려진 솔비를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권지안으로 새 출발하면 불편하지 않을까. 그냥 남들이 다 아는 솔비로 시작하면 편할 텐데. 필자의 의아함에 그는 솔비와 권지안을 이렇게 구분했다. “솔비는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였어요. 제 의견보다 회사 사장님의 의견이 컸고, PD들의 관점이 중요했어요.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져야 했다고 할까. 타인으로부터 만들어진 자아입니다. 정체성에 혼란이 왔어요.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게 뭐야?’ 언제부턴가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했죠. 솔비는 완전히 살아남기 위해서 자극적이어야 했어요. 회사에서 짠 틀 안에서 제 역할을 한 인물이죠. 저는 솔비라는 캐릭터에 맞춰 충실하게 살아왔고, 지금은 권지안이라는 캐릭터에 충실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저랑 가까운 배역을 맡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음악과 미술의 충돌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장르의 결합이 쉽지 않은데 두 개의 자아를 하나로 합치는 게 녹록한 일은 아닐 테다. 두 장르 중 어느 것의 비중이 높을까. “미술에 둘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미술을 하려면 음악이 있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낮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음악에서 정확하게 느낌이 오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가 없거든요. 오히려 음악을 만들 때 더 예민해져요.” 다시 미술 얘기로 돌아가서, 그가 작업하고 있는 ‘핑거 페인팅’이 궁금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이용한다. “물감을 만지면 소리가 나요. 거기에서 나오는 자극이 그림을 그리는 리듬이 되고요. 계획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색이죠. 저는 한 번 시작하면 중간에 끊지 않고 계속 그려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색을 보면 신기하고 재밌어요.”
그는 활동하면서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시청률을 보증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PD들은 솔비를 캐스팅하려고 안달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지. 그만큼 악플로 태클을 거는 이들도 많았다. 작가로 활동하는 지금도 마찬가지. “유명세를 등에 업고 예술을 한다”, “수천만 원에 거래되는 게 실화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런 불편한 상황조차 그는 이렇게 받아넘겼다. “다른 연예인은 모르겠어요. 적어도 저는 미술과 반대편에서 활동했잖아요. 사람들은 저를 웃기는 사람으로 기억해요. 어떤 이는 ‘뇌순녀’(뇌가 순수한 여자)라고도 해요. (웃음) 가벼운 존재로 기억하는 거죠. 하지만 누가 가벼운 사람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겠어요? 작품을 거래하는 분은 ‘솔비는 제로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마이너스 에서 시작했다’고 말해요. 그런데 단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많이 알려진 사람이니까 다른 작가보다 제 작업을 소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어느 정도 가격이 있는 작품을 단지 연예인이기 때문에 소장한다고 보진 않아요. 사람과의 교감이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지난 6월 12일 발매한 디지털 싱글 음반 <하이퍼리즘 바이올렛>(Hyperism Violet)과 인사동에서 막을 내린 전시 <Real Reality; 불편한 진실>의 공통점은 ‘아픔’이다. 그동안 음악과 미술을 통해서 그가 받았던 상처가 치유됐는지 궁금했다. “당연하죠. 선물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선물이라 느낄 만큼 이 마음이 소중하죠. 과거의 저처럼 힘든 누군가에게 나눌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 자체로도 치유가 됐다고 생각해요. 주관적 자아에서 객관적 자아로 바뀐 게 아닐까요?” 작업실 한편에 놓인 메모장엔 작가 권지안에 대한 소개가 적혀 있다. 전시장을 찾아온 관람객에게 자신의 작품을 소개한 글로 보이는데, 왜 미술에 발을 들여놨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말이다. “저에게 미술은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에 다시 살 수 있도록 도와준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받은 이 선물을 나누고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이젠 제 개인의 치유만이 아니라 세상의 치유를 위해 미술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오는 10월 5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2019 라 뉘 블랑쉬 파리>(La nuit blanche, 백야)에 전시 작가로 초대됐다. 인터뷰가 진행되기 며칠 전인 6월 24일, 전시 위원회로부터 최종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2002년부터 시작된 <라 뉘 블랑쉬 파리>는 매년 10월 첫 번째 주말, 단 하루 동안 파리가 미술관으로 바뀌는 축제이다. 매해 200만 명의 관객이 찾으며 회화, 설치미술, 미디어아트, 퍼포먼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린다. 파리에서 진행된 이후 브뤼셀, 시카고, 마드리드, 로마, 텔아비브, 몬트리올, 상파울로, 토론토, 리즈, 상하이로 이어진다. ‘현대미술의 장’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아트 축제이다. 여기서 그는 <바이올렛> 퍼포먼스와 전시 작품을 선보인다. 축제에 초대된 30명의 작가들 가운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세계적인 행사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는 소감을 물었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미술가 30명이 모이는 국제적인 축제잖아요. 경연은 아니지만 대표주자로 참여한다는 마음이에요. 베스트 3 안에는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웃음)”
다름은 틀림이 아니기에
그는 가정과 아이들에 관심이 높다. 가정위탁 홍보대사로 활동했으며, 2017년에는 실종 아동을 찾는 ‘파인드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했고, 6년째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비전이 개최한 ‘제1회 마음이 그리기 대회’에 일일 미술 교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유독 아이들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과 연결시켰다. “어렸을 때 느꼈던 외로움에 아직 묻혀 있는 거 같아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는데 저희 집은 모든 것을 밀어줄 만한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지금도 당시의 아픔을 가진 아이의 기억에 멈춰 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을 보면 최대한 아픔없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죠. 그걸 스스로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이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거든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을 거예요. 제 소망은 좋은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 2017년, 국내 유일 장애 예술가들의 창작 레지던시인 잠실창작스튜디오의 <프로젝트A>에 참여했다. 프로젝트의 ‘A’는 가능성을 나타내는 ‘able’을 뜻한다. 즉, 가능성이 있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한 멘티-멘토 결합 프로그램이다. 2년 전 아이들과 핑거 페인팅을 함께한 데 이어 지난 7월 27일 두 번째로 방문했다. 재밌었던 기억도 있고 정말 애들이 좋아서 다시 방문했다는 그는 몸이 불편한 아이들을 지원하는 서울문화재단에 고마움을 전했다. 약간 불편한 그들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공공기관의 역할을 강조했다. 자신의 역할은 단지 아이들이 바로바로 촉각을 느낄 수 있게끔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라며, 그것이 좋아서 참여한다고 했다. 잠실창작스튜디오는 이처럼 재능이 있지만 100%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 어려운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키우는 곳이다. 자신이 어려움을 극복했던 것처럼 이들도 역경을 이겨냈으면 하는 바람인 듯하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에요. 그 친구들은 특별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죠. 특별함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재능과 꿈을 실현할 수도 있잖아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진행하면 좋겠어요. 그런 친구들이 많아질수록 건강한 사회가 실현될 겁니다. 진심으로 응원해요.”
- 글 이규승_서울문화재단 홍보팀장
사진 손홍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