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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최인훈의 단편 <총독의 소리>와 <주석의 소리>소설의 통념적인 형식을 벗다
7월 23일, 향년 84세에 암으로 타계한 최인훈은 박상륭(1940~2017)과 함께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관념적 소설을 써냈다. 박상륭의 관념이 종교적 상상력에 젖줄을 댔다면, 최인훈은 철학과 역사, 정치에 기반했다. 내러티브나 캐릭터가 아닌, 도저하고 치열한 사유의 흐름을 보여준 최인훈의 소설은 한국의 독자들이 좀처럼 만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최인훈의 대표작으로는 1960년 발표된 <광장>이나 후기의 걸작 <화두>를 꼽지만, 지금 살펴볼 작품은 1960~70년대에 연작 형식으로 발표된 단편 <총독의 소리>와 <주석의 소리>다.

적의 입을 빌려 우리를 깨우치다<총독의 소리> 최인훈 지음, 문학과지성사

“제국의 반도 만세. 여기는 조선총독부지하부가 보내드리는 총독의 소리입니다. 총독 각하의 특별 말씀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는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해방됐으나, 총독의 혼은 지하 어딘가에 은신해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에게 해적 방송을 내보낸다. 총독은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린다. 한일협정 반대운동의 여진이 남아 있던 1967년 처음 발표된 <총독의 소리> 연작은 이처럼 가상의 해적 방송을 통해 우리 안의 식민지 의식과 제국주의자들의 사상적 궤적을 기묘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들에게 반도는 “제국의 영혼의 비밀”이자 “종족의 성감대”였다. 반도라는 제물을 통해 제국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식민지의 회복은 제국이 다시 일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반도인들의 자주적 움직임에 대해 총독은 비아냥대고 민감한 반응을 내놓는다. 4·19혁명을 두고도 총독은 독특한 감상평을 말한다. ‘귀축미영’의 족속들이 받드는 민주주의란 “선거라는 제사를 통하여 신탁을 묻고 그 신탁을 통하여 정치를 한다는제정 구조”인데, 이 제사에 부정이 끼어들었기에 반도인들이 궐기했다는 것이다. 총독은 반도인들의 이 같은 움직임을 “집단적 지랄병”이라 칭한다. 1919년 3·1운동도 역시 ‘지랄병’이라 분류한다. (총독의 인식을 따르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나 2016년의 탄핵 촛불시위도 ‘지랄병’이 되겠다.) 총독에게는 다행히도, 반도인의 살림이 좋아지고 평화가 이어져 힘을 찾을 날이 쉽게 올 것 같지는 않다.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최인훈의 평생 화두와도 같은 분단 상황 때문이다. 총독은 남북 분단을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상황, 즉 “반도인으로 하여금 반도인을 고달프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반도인들은 분단 상황 때문에 군비의 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빈곤의 쇠사슬에 묶여 있다. 남과 북은 각자의 엄청난 군사력으로 만주의 고토를 되찾거나 일본을 치지 않는다. 그저 반도 한복판에 국경을 그어놓고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눌 뿐이다. 마치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처럼, <총독의 소리>는 불쾌하면서도 흥미롭다. 병리적인 사유의 논리를 추적하다 보면, 행간에 스민 일말의 진실이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총독의 논리가 일본뿐 아니라 한국 내 어떤 이들의 약육강식 세계관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친다. <총독의 소리>의 현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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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8년 출간된 ‘최인훈 전집 9’ 표지.

2 2009년 출간된 ‘최인훈 전집 9’ 개정판 표지.

소설로 쓴 민족주의 관점의 세계사<주석의 소리> 최인훈 지음, 문학과지성사

“삼천리 금수강산 만세. 여기는 환상의 상해임시정부가 보내는 주석의 소리입니다. 주석 각하의 3·1절 담화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주석의 소리>가 <총독의 소리>와 같은 점은 라디오 방송이라는 것이다. 한때 한반도에 존재했으나 이제는 사라진 존재의 목소리라는 설정이다. 하지만 제국과 식민지, 총독과 주석이라는 입장에서 보이듯, 각 단편이 담고 있는 세계관은 거의 정반대다.
<주석의 소리>는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 지도자의 역사, 세계관을 실어 나른다. 소설적 형식으로 선보이는 민족주의 관점의 세계사 정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주석의 소리>는 <총독의 소리>에 대한 해독제 역할을 한다. ‘이것이 소설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최인훈은 “이 작품의 형식은 소설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인 서간문 또는 일인칭 형식의 변형”이라 답했다.
주석은 15~16세기의 서양 르네상스부터 역사의 흐름을 살핀다. 서양은 종교개혁, 산업혁명 등을 거치며 자신을 “지구사의 보편적 주체로까지 완성시키는 과정”에 오른다. 하지만 ‘민족국가’와 ‘계층성’이라는 두 가지 조건은 인류사적 보편성을 제약한다. 서양 사회의 좁고 불평등한 현실은 식민지의 희생으로 보정된다.주석은 서양 근대사의 전개를 이야기한 뒤, 한국의 상황을 언급한다. 한국은 근대 유럽이 수세기 동안 거쳐온 역사를 압축적으로 겪어야 할 상황이므로, 여러 가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주석은 정부, 기업인, 지식인, 국민이 해야 할 행동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후진국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할 것은 정부이며, 그 권한 행사는 헌법을 따라야 한다. 기업은 유능해서 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자유를 누리겠지만, 그러한 유능함을 허락하는 것은 사회라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지식인은 상품처럼 지식을 거래하거나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이런 제약을 너무 강조하는 것도 진실은 아니다. 국민은 익명의 조직을 이루는 개인들이다. 조직은 조직의 생리로 움직이지만, 결국 조직도 개인에 의해서 움직인다.
주석의 방송은 논리정연하고 정의롭다. 하지만 총독의 방송에 비해 이상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최인훈은 상해임시정부 주석, 조선총독부 총독이라는 상반된 지향의 연설을 통해 사상의 모험을 펼쳤다. 한 작가가 두 개의 분열적 자아로 집필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 논리와 통찰력이 반세기 뒤에도 반짝인다는 점이 더 놀랍다.

글 백승찬 경향신문 기자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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