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뮤지컬 <영웅> 공연 모습. ⓒ (주)에이콤
3 영화 <눈길> 포스터.
애국심의 의미를 묻다
소위 ‘국뽕’(국가에 과도하게 취해 있음을 뜻하는 신조어)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분단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남한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위로부터의 ‘애국심’을 고취시킴으로써 부정한 권력을 정당화했다. 최근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애국심’이라는 담론은 ‘국뽕’과는 별개의 것이다. 국가주의나 애국심에 호소하는 문화콘텐츠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젊은 층의 반응도 달라지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애국심을 소재나 주제로 한 문화콘텐츠는 여럿 있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영화 <국제시장> <명량> <인천상륙작전> 등, 그 편향적인 ‘애국심’에의 고취가 정당한 비판과 신랄한 비난에 직면했던 작품들이 소위 애국심 콘텐츠의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최근 위로부터 강요된 애국심이 아닌, 애국심 자체의 의미와 의의를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여러 문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설민석의 역사 강의는 하나의 신드롬을 만들어낸 문화콘텐츠이다. (물론 ‘콘텐츠’라는 말로 가장 극명하게 대변되는, 현재의 문화적 현상에 대한 소비의 형태가 지닌 자유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속성에 대한 강조 또한 일반적으로 주목해야 할 어떤 징후임을 지나가는 길에 밝혀둔다.) 이 강의는 ‘역사적 윤리와 상황적 인식에 대한 단순화’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확장된 인문학 호기심에 힘입어 한국사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설민석의 강의는 단순히 우리의 한국사가 특별하며 우월하다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강조하지 않는다. 민족이나 국가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아전인수 식의 강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문제된 상황들이나 인물들을 통해 현재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역사의 가장 기본적인 학적 윤리를 따른다. 그 점에서 기존의 대중적 역사 강의와 차별화된다. 최근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폄훼 발언 논란도 있었지만, 그의 강의가 쉬운 말과 가까운 예로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설민석의 역사 강의가 하나의 문화콘텐츠이자 현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강의만의 장점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세월호 사건 이후 거의 전 국민적으로 일어난 어떤 근본적인 의문과 관련이 있다.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 역사를 통해 그 국가는 국민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왔던가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의문으로 인해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새삼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관심이 애국심 콘텐츠의 부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애국심의 이행, 애국에서 애민으로
물론 설민석의 역사 강의 역시 자국 중심의 역사 해석의 한계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강의에는 기본적으로 한국이 어떻게 동북아 중심 국가가 될 것인가 하는 국가 미래주의적 기본 인식이 깔려 있고, 또한 ‘국력’이라는 담론으로 대표되는 국가 간 권력 이론의 한계 역시 포함하고 있다. 이는 특히 설민석이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강의에서, 이러한 담론을 통일 논의의 가장 ‘상식적인’ 논리로 삼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 강의와 과거의 담론들과의 차이점은 긍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안에서 강조하는 것은 애국(愛國)이 아니라 애민(愛民)이다. 국가나 민족을 절대적인 실체로 추상화할 수 있는 위험을 벗어나, 애국심의 실체가 단순히 국가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애국’의 가치가 아니라 사람, 민중, 국민, 시민, 인민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애민’의 의미로 강조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을 강요하는 파시즘적 애국심으로부터 탈피하여, 애국심의 근원이 역설적으로 국가 그 자체의 가치를 떠나 근본적인 인간애 자체로 이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후일 수 있다.
그 이행이 성공할 수 있을까? 아직 알 수 없지만, 이 중요한 이행의 징후에 주목하며 다시금 애국심의 의미를 민주주의와 애민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반추해본다. 여전히 민주주의와 애민의 기본적인 인간 정신을 잃고 그저 폭력적인 국가와 강요된 희생만을 찬미하는 애국자가 있다면, 마크 트웨인의 애국자에 대한 촌철살인 정의를 다시 한 번 상기하기를 바랄 뿐이다. “애국자: 자신이 무엇에 대해 소리치는지도 모르는 채 가장 시끄럽게 소리칠 수 있는 사람(Patriot: the person who can holler the loudest without knowing what he is hollering about).”
- 글 최정우_ 비평가, 작곡가, 기타리스트. <사유의 악보-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을 썼고, 프랑스 파리 국립동양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음악집단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