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몸을 위한 피난처이자 거점이길.” (시인 심보선)
“자부심 있고 용감한 극장이길.” (연출가 타다 준노스케)
지난 2010년 헝가리 정부와 국회가 정부 비판을 이유로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해임하려고 했을 때,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평론가들이 발 벗고 나서서 항의 서한을 보냈고 결국 헝가리 정부는 이 계획을 철회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2016년, 한국의 관객들은 국립극장 무대에서 바로 이 검열논란의 헝가리 연출가와 한국 배우가 함께한 셰익스피어의 <겨울이야기>를 만나게 되었지요.
2007년, 아랍의 예술가들이 정작 자신의 나라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공연을 올리지 못하고 유럽 무대로 건너오고 있을 때, 예술가들은 어떤 이유로든 자신이 태어난 홈그라운드에서 공연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며, 온갖 위협 상황 속에서도 <미팅 포인트>라는 아랍 축제를 진두지휘한 용감한 국제페스티벌 디렉터가 있습니다. 2016년 우리는 그녀가 기획한 <아워 마스터즈>라는 프로그램을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2012년 이라크 파병 실화를 다룬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작품이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에 소개되었을 때, ‘정부의 압력은 없었는가?’ 라는 질문을 향해 “국립극단은 정부 후원으로 운영되지만 정부 기금은 결국 세금이다. 우리는 정부가 아니라 세금을 내는 국민을 위해 일할 뿐”이라는 연출자의 발언이 여러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2016년, 우리는 이 연출가의 작품 <렛 미 인>을 예술의전당에서 만났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2016년, 우리가 처한 연극계의 현실적 압박과 비교해볼 때, 예술 본연의 자유를 도리어 강력히 주장해온 비판적인 해외 예술가들에게만큼은 국가적 차원의 환대와 지원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동시에 한국에서 연극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야기하는 작가들은 더는 발 디딜 곳이 없다고 토로합니다. 따라서 일관되지 않는 이 상황이 참으로 모순이라고 느껴지는 2016년, 남산예술센터는 한국 연극의 고단한 현실을 함께 겪고 있는 우리의 작가들과 먼저 동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장시간의 피난처이자 용감한 게토로 명명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극장은 어떤 극장이건 간에 작가들이 공연할 권리, 관객들이 보아야 할 권리를 제약하지 않는 공공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저 명확히 하고 싶을 뿐입니다.
“시대를 질문하는 소요의 산실이길.” (연출가 박근형)
“동시대의 목소리이길.” (연출가 김재엽)
“오늘의 한국 연극, 한국 연극의 오늘이 되길.” (변방연극제 (전)예술감독 임인자)
‘동시대’라는 화두는 남산예술센터 개관 이후부터 줄곧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대 예술이란 지금, 여기, 오늘의 작가들이 오늘의 관객을 만나는 예술이라 합니다. 그러나 전쟁과 테러, 재난과 시스템, 자본과 인간성의 상실 등 우리를 둘러싼 현대사회는 너무나 복잡합니다. 세상에 대해 가장 의심많고, 질문 많고, 할 말 많은 존재를 우리는 ‘작가’라 부르지요. 하니,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처음 서게 될 구자혜 작가의 작품 제목이 그리도 긴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이 작가들이 터를 잡는 극장 공간은 필연적으로 논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산예술센터는 논쟁 없는 공허한 극장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1년 내내 옥신각신하셔도 좋습니다. 우선, 공공극장이란 이름으로 안주하고 있는 남산예술센터부터 기꺼이 논쟁의 대상으로 삼으십시오.
“극장의 구조를 살리되, 극장의 구조에서 벗어나길.” (평론가 이경미)
“새로운 상상을 위한 모험의 공간이길.” (문학과지성사 사장 주일우)
프로시니엄 무대와 아고라형 객석을 한 몸에 품고 있는 남산예술센터는 한국 연극사를 일구어온 수많은 연출가의 가슴을 설레게 해왔습니다. 또한 김소연 연극평론가의 표현에 따르면 ‘연출가의 무덤’이 되어 수많은 연극인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공간이기도 했지요. 이 영감의 공간을 채울 올해의 연극은 아마도 제각각일 것입니다. 언어의 조탁과 전통적인 서사로 뚝심 있게 밀고 나오는 희곡 기반의 작품도 있고, 도무지 논리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세계를 어떻게 기존의 내러티브로 표현할 수 있냐며, 새로운 무대언어를 제시하는 개념 기반의 작품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뭇 상반되어 보이는 이 양단의 축이 지금, 함께 공존하는 한국 연극의 풍경입니다.
“한국 연극사를 다시 쓸 창작 연극의 성좌가 떠오르길.” (극작가 김명화)
“창작극 개발에 앞장서는 극장이길.” (극작가 고연옥)
“21세기 통틀어 가장 핫한 연극이 나오길.” (연출가 이경성)
‘창작 초연’이라는 말은 참으로 두렵고 무섭습니다. 작가도, 연출가도, 배우도, 극장 스태프들도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관 이후 창작 초연원칙을 고수하는 남산예술센터는 이 두려움과 떨림의 원칙을 고수할 예정입니다. 물론 많은 부담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모험을 함께 해주시는 공동제작 극단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더불어 이 위험부담을 함께 져주실 분들은 바로 관객 여러분입니다. 시도와 시도, 실패와 실패, 실험과 실험이라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긋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남산예술센터는 미련하고, 비효율적이게, 믿고 싶습니다.
“안과 바깥의 경계이길.” (평론가 안치운)
“끝까지 살아남길.” (세종문화회관 사장 이승엽)
보내주신 모든 바람에 일일이 답장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마도 올 한 해는 보내주신 그 많은 바람과 차가운 현실 사이, 그 경계 위에 아슬아슬 남산예술센터는 존재할 것만 같습니다. 그 어떤 연극보다 드라마틱할 이 경험에 관객 여러분을 모십니다. 함께해주십시오.
- 글 우연
- 남산예술센터 극장장
- 그림 손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