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문화+서울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SOUL OF SEOUL

5월호

끝없는 디아스포라

대선을 며칠 앞둔 어느 늦은 밤, 열어놓은 방문 사이로 시어머니의 통화 음성이 간간이 들려왔다. 대화 상대는 캐나다에 거주 중인 어머님의 여동생이었다. 남편의 이모님은 대단히 강경한 목소리로 한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다. 한국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이민자의 삶이 크게 달라진다는 거였다. 국경 너머의 삶에 관심을 가져본 일이 거의 없는 나도 최근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책상 위엔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를 올려두었고, 드라마 <파친코>를 보기 위해 매주 금요일 밤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웹진 [비유] 52호 포스터

미스터 호철 리. 장인어른은 1942년에 태어났다. 도시 이름을 잊어버렸는데(G로 시작한다는 것만 기억난다), 지금은 북한에 있는 도시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내 예상과 다르게 장인어른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G라는 도시는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그러나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공간을 의미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문지혁,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 중

소설 속 ‘나’는 아내의 아버지 호철을 만나러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화자는 공항 로비에서부터 자기 장인의 삶을 돌아보면서, 인상적인 기억들을 아이패드에 글로 적어 정리하기 시작한다. 호철은 이민자 1세대의 전형으로 식당 허드렛일로 미국에서 삶을 시작했다. 북에서 태어나 생의 대부분을 이민자로 살아온 그는 평생에 걸쳐 일궈온 삶을 정리한 뒤 한국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북녘 고향 땅을 끝내 밟지 못한다는 점에서 귀국 후에도 그는 영원한 이민자일 수밖에 없다.

“다 끝났어. 한국에 돌아가야 해.”
설거지하려고 그릇을 싱크에 넣고 있는데 등 뒤에서 호철이 말했다. 조이는 화장실에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노 웨이.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동안 미국에서 장인어른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어요? 그랜드 마스터, 태권도 도장, 슈퍼마켓, 가족, 사업, 네트워크, 기부, 봉사, 그리고 조이까지……. 장모님 돌아가신 건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장인어른에겐 장인어른만의 인생이 있잖아요.
이렇게 포기할 거예요?”
문지혁,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 중

아내가 죽고 호철은 한국에 돌아갈 결심을 굳힌다.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분단 상황 속에서 호철에게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내의 죽음으로 미국에서의 삶은 의미를 잃었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호철은 남한에서도, 그것이 미국과는 다른 방식일지언정, 여전히 디아스포라로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단편소설의 형식 안에서 호철이 겪은 차별의 역사와 경험이 구체적 이야기로 드러나기는 어렵다.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는 장인에게 애정을 가진 미국인 사위의 시선을 통해 호철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몇 개의 에피소드로 짐작하게 한다. ‘나’는 소설의 서술자로서, 너무 가까운 사람의 인생에서 느끼는 애처로운 시선을 얼마간 거둔 채, 호철의 일생을 담담하게 바라본다. 한 이민자의 지난한 삶과 그에 맞서는 끈질긴 열정, 그럼에도 평생 지녀온 선량함과 유쾌함,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섬세한 개성이 모두, 다소 엉뚱한 성격의 ‘나’가 아이패드에 적은 글을 거치며 간결해진다. 괜히 비장해지지 않는 짧은 에피소드 몇 개로 이민자의 딜레마를 충분히 전달하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한국에 도착한 호철의 딸 조이와 사위 ‘나’는 공항에서 PCR 검사를 진행한 후 2주간 호텔에 격리된다. ‘나’는 그 시간을 와이파이에 의지해 알차고 즐겁게 보낸다. 그러나 호철의 딸은 그렇지 않다. 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호철과 조이는 한국 내에서 ‘한국 내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조이는 초초해하는 동시에 분노한다. 소설이 마지막까지 강조하는바, 디아스포라의 부유하는 정체성은 매우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방식으로 이민자의 감정과 일상을 침범한다.

김잔디_[비유] 편집자 | 사진 제공 웹진 [비유]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