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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5월호

운명은 반도네온을 타고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실수를 하면 스텝이 엉키게 되는데 그게 바로 탱고입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1992)에서 퇴역 장교인 주인공(알 파치노)은 식당에서 처음 만난 여인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와 멋지게 탱고를 춘다. 그는 시력을 잃어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탱고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즉흥적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이때 배경음악으로 흐른 카를로스 가르델의 ‘포르 우나 카베사Por una cabeza’는 시간이 흘러도 그 감동이 퇴색되지 않는 불후의 탱고 명곡이다.

탱고에 대해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거장이 있다. 탱고에 클래식과 재즈를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의 음악으로 아르헨티나식 탱고 음악 ‘누에보 탱고’를 만드는 데 주력해 온 아스토르 피아졸라다. 그는 ‘리베르탱고Libertango’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 ‘오블리비언Oblivion’ 등의 곡을 통해 국경을 막론하고 ‘탱고의 전설’ ‘탱고의 황제’로 불린다. 2021년은 피아졸라 탄생 100주년이었기에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자리가 많았다.
탱고, 영화 <여인의 향기>, 아스토르 피아졸라. 탱고에 관심이 있거나 탱고 음악을 검색해서 들어본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직관적으로 또 한 사람을 떠올릴 확률이 높다. 바로 고상지다. 단정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매력이 여과 없이 발휘되는 장르 또한 탱고 음악이기 때문이다. ‘탱고의 영혼’ ‘탱고의 심장’으로 통하는 ‘반도네온Bandoneon1 독일의 카를 프리드리히 울리히가 만든 독일식 콘체르티나를 기반으로 하인리히 반트가 음을 추가하고 일부 개량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악기이다. 연주하기가 까다롭고 난해해서 ‘악마의 악기’로 통한다. 양손으로 주름상자 측면의 70여 개 건반(버튼)을 누르면서 140여 개의 음을 낸다. 을 연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뜨거운 에너지가 전해진다.

탱고 음악에서 발견한 게임의 감각

고상지는 어쩌다 반도네오니스트가 됐을까? 왜 탱고 음악이었을까? 대답은 의외의 영역에서 나온다. 바로 ‘애니메이션’과 ‘게임’이다. “게임을 할 때 나오는 BGM이 항상 저를 흥분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OST를 들으며 길을 걷고 있으면 제가 정말 용사가 되어 모험을 떠나거나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 들곤 했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는 피아졸라의 음악을 들으면서 게임 속 전투 음악을 떠올렸다.
TV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아벨탐험대>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다. “<아벨탐험대>가 제가 어릴 때 엄청 몰두했던 게임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 중 하나거든요. OST 전부 제가 어릴 때부터 알고 좋아한 곡들인데 뭔가 사운드가 달랐어요. 어릴 때 들었던 그 사운드가 아닌 거예요. ‘편곡’을 한 거죠.” 그렇게 악기와 편곡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에반게리온> 등의 작품에서는 BGM을 통한 애니메이션 연출에도 흥미를 느끼게 됐다.
평소 음악에 대한 열망과 음악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리고 종종 작곡과 편곡을 하면서 음악가로서의 삶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절호의 기회로 반도네온을 손에 넣으면서, 그의 인생은 흔한 비유로 ‘180도’ 달라졌다. 당시 카이스트 토목공학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전공과 진로에 큰 흥미와 기대가 없었다. 음악에 관심은 있었지만 모든 것을 오직 음악에만 걸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 커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탱고 음악과 반도네온을 만나면서 이른바 ‘틈새시장’을 본 것이다.
대학을 자퇴하고 반도네온을 선택한 것은 용기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한 내려놓음이자 순응이기도 했다. 싫어하는 건 절대 못 하는 성격도 결정에 도움이 됐다. 이렇게 커다란 흐름만 보면 마치 인생의 판도가 공학도에서 음악가로 운명처럼 바뀐 것 같다. 하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스스로 판단하기를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없다”고 여기는 그에게는 탱고 음악과 반도네온을 선택한 이후의 모든 여정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도전과 모험의 연속이었다.

게임을 할 때 나오는 BGM이 항상 저를 흥분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OST를 들으며 길을 걷고 있으면
제가 정말 용사가 되어 모험을 떠나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곤 했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네모난 주름상자를 들고 국경을 넘다

2006년 가을, 길거리 공연으로 출발했다. 대학 재학 중 메탈 밴드부에서 일렉베이스 기타를 연주한 경험을 기반으로 반도네온 음계와 코드를 겨우 익혀 어설프게나마 대전 충남대와 카이스트 사이의 번화가에서 버스킹을 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초석을 쌓아가는 시간이었던 만큼 그 시간은 그를 설레게 했다. 그리고 또 그만큼 그를 아프게도 했다. 날것 그대로의 경험 앞에서 수시로 자신의 민낯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연을 하면 할수록 음악이라는 위대한 세계 앞에서 깊은 우울감과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의 악사로, 반도네오니스트로, 꾸준히 자신만의 이력을 쌓아가던 그에게 행운의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그의 거리 공연을 인상 깊게 본 어느 행인이 일본의 최정상급 반도네오니스트인 고마쓰 료타에게 그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이후 고마쓰 료타에게서 거짓말처럼 응원의 메일이 왔고,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마쓰 료타에게 “반도네온을 배우고 싶다”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렇게 3개월마다 일본을 찾아가 2주 동안 머무르며 반도네온을 배웠다. 그 시간이 3년이다. “처음 도쿄에 갔을 때 선생님께서 정말 다정하게 맞이해 주셨어요.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탱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착하고, 또 연주도 잘하면서 성실한 분들이라 정말 즐겁게 배울 수 있었죠. 물론 공부하면서 힘들고 자괴감에 빠질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라멘이나 덮밥 같은, 24시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그 시간마저 행복하게 보냈어요.(웃음)”
반면, 이후 2년의 아르헨티나 유학 생활을 이야기할 때는 힘든 기억부터 소환한다. “암흑기였다고 해야 하나. 편의시설 같은 도시의 시스템에 익숙하던 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같은 곳에 가니 모든 게 힘들더라고요. 강도에게 크게 당하고 충격을 받아 열흘 가까이 집 밖에 못 나간 적도 있어요.” 그럼에도 좋았던 기억에 대해 묻자 곧장 음악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장들의 연주를 일주일에 2~3번 정도로 자주, 그것도 저렴한 가격에 들을 수 있었다는 점, 그들에게 직접 악기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좋았어요. 아, 또 하나. 메디아 루나(아르헨티나 크루아상)가 맛있다는 것도!”

사람들이 즐겨 듣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내가 만족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는 음악은 이제 하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좀 들어줄까?’를 생각하며 다음 음반을 계획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즐겨 듣는 음악을 하고 싶다

그렇게 탱고 음악과 반도네온을 공부하고 연주하며 반도네오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의 재량을 키워나간 고상지. 본인 스스로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도 삶이 그를 준비시켰다. 이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가수 하림의 소개로 김동률 5집 앨범 발매 콘서트의 반도네온 세션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를 통해 정재형과도 인연을 맺게 됐으며 이후 윤상, 이적, 유희열 등 다양한 뮤지션의 작품과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했다. 2011년 MBC <무한도전>에서 반도네온 반주를 맡고 나서는 대중적 인지도도 올라갔다.
방송 세션이나 협연 등의 기회가 많아 얼굴이 알려진 덕분인지 많은 사람이 그를 국내 유일의 반도네오니스트, 최초 반도네오니스트, 최고 반도네오니스트라고 불렀다. 그런 반응을 그저 즐길 법도 한데 그는 “좀 오해가 있다”며 애써 정정한다. “다양한 연주자들이 누에보 탱고, 고전 탱고 등에서 심도 있는 활동을 하고 있고, 저보다 더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분도 많아요. 연주는 저보다 잘하는 사람도 많고요. 저는 반도네온 연주 자체보다는 작곡과 편곡에 더 흥미가 있어서 그 부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요.”
고상지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고상지 밴드’다. 공연의 성격에 맞게 연주자를 섭외해 진행하는데 경우에 따라 고상지 트리오가 되기도, 콰르텟이 되기도, 오케스트라가 되기도 한다. “정말 고마운 친구들이죠. 음악을 업으로 삼기 전인 20대 초반에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을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선물 주고 어필하던 때가 있었는데요,(웃음) 우리 밴드 친구들은 아마 제가 음악을 안 했으면 계속 따라다녔을 그런 존재들이에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아요.”
최근 준비 중인 작업으로는 그가 작곡한 곡들을 피아니스트 조영훈이 피아노 솔로로 연주하는 <피아노 소곡집> 앨범 발매, 존경하는 작곡가의 곡을 편곡한 <존경을 담아> 프로젝트, 그리고 미발표 자작곡들 녹음 등이 있다. 반도네온과 함께한 지 16년, 그 성취를 인정받아 지난해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은 고상지는 이제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어 할까? “사람들이 즐겨 듣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내가 만족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는 음악은 이제 하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좀 들어줄까?’를 생각하며 다음 음반을 계획하고 있어요.”
모종의 미련이나 후회가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원 없이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마음의 코드를 따서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자신만의 연주를 실컷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 인생의 축복에 대해서는 “반려묘 바니를 만난 것”이라 답하고, 하루의 낙에 대해서는 “여러 맛의 커피 원두를 분쇄해 내려 마시는 것”이라고 답한다. 이상형은 없으나 굳이 말한다면 “자신감 넘치는 사람보다는 자신감이라는 것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좋다고 한다. 그의 대답은 마지막까지 의외의 영역에서 나온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을까? “나중에 마당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하게 된다면 안락사 직전의 유기 동물을 임시 보호하면서 살고 싶어요.”

장보영_객원 기자 | 사진 제공 프라이빗커브, 제이에스바흐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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