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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5월호

‘수궁가’의 영원한 라이벌,
임방울과 김연수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정서를 우리나라 고유의 악기와 장단과 소리로 구성지고 맛깔나게 풀어내는 우리 음악, 국악. 음악의 세계는 가히 무궁무진하나 다양한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확인하게 되는 자명한 사실이 있다면, 바로 국악이 가지고 있는 ‘대체 불가함’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다양한 집필 활동과 창작 활동으로 국악을 대중에게 재미있고 친근하게 소개해 온 대한민국 1호 국악 평론가 윤중강이 [문화+서울] 독자들을 위해 또 한 번 펜을 든다. 말하자면 국악 비하인드 스토리. 당신이 몰랐던, 알려지지 않은 국악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리꾼 임방울(위), 김연수(아래)의 모습

‘토끼타령’을 공연한 동양극장. 조선성악연구회 공연은 대부분 동양극장에서 열렸다. 중구의 현 농업박물관 자리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판소리 ‘수궁가’의 한 대목이다. 수궁에 사는 자라는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해 바다를 떠난다. 육지에 도착한 자라는 토끼를 부른다는 것이 그만 호랑이를 부르게 됐다. ‘토생원’이라고 해야 할 것을, ‘호생원’으로 잘못 부른 거다. 그래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1938년 3월 13일부터 닷새 동안 동양극장에서는 ‘토끼타령’이 펼쳐졌다. 바로 이 ‘수궁가’를 창극으로 공연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젊은 소리꾼 2명이 주인공을 맡았다. 토끼는 임방울1904~1961, 자라는 김연수1907~1974였다.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와 같았다.
대중적 인기는 임방울이 앞섰다. ‘쑥대머리’라는 불후의 명곡이 있었다.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옥에 갇힌 춘향이를 부르는 노래로, 1930년대 ‘조선의 명곡’으로 사랑받았다. 학식이 풍부한 김연수는 판소리의 ‘이면’에 맞는 노래를 불렀다. 판소리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도 깊었다. 가사가 분명했고, 늘 상황에 맞는 소리를 했다. 임방울이 소리를 중심으로 한 ‘공연 지향’이라면, 김연수는 대본에 충실한 ‘연극 지향’이었다. 요즘에 비교한다면, 임방울이 콘서트 가수라면, 김연수는 뮤지컬 배우와 같았다고 해야 할까?
공연 제목도 ‘토끼타령’이니 임방울에게 더 무게중심이 있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김연수가 연기를 잘하니 그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자라처(박록주), 자라첩(성미향), 자라모(이소향)까지 등장해서 자라에 집중한 공연이었다. 자라의 캐릭터와 김연수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서 당시 이 공연을 만든 ‘조선성악연구회’는 최선을 다했다.
두 사람은 모두 유성준1873~1949 명창 문하에서 판소리를 익혔다. ‘유성준’ 하면 ‘수궁가’였고, 특히 ‘자라가 토끼를 만나는 대목’으로 유명했다. 두 사람은 이 대목을 잘 부르려 했는데 임방울은 토끼의 입장에서, 김연수는 자라의 입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임방울은 온리 원only one, 김연수는 넘버 원No.1을 지향한 사람이다. 그게 곧 ‘수궁가’의 토끼였고, 자라였다. 토끼는 뭍에서의 서열이 싫었다. 그래서 수궁에 가면 비교 대상이 없고, 자신이 확실히 ‘온리 원’이 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자라는 수궁에서 넘버 원이 되고자 했다. 용왕을 살려낸 특효약인 토끼의 간을 구해 수궁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게 토끼와 자라였고, 바로 임방울과 김연수이다. 1940년대 들어서 조선성악연구회가 점차 유명무실해지자 임방울은 주로 ‘혼자’, 김연수는 늘 ‘같이’ 활동했다. 임방울은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을 지양하면서 자신의 명성에 기대 무대에서 인기를 누렸다. 반면 김연수는 창극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임방울에게는 뚜렷한 제자가 없었지만 김연수에게는 늘 제자가 따랐다. 김연수는 그러했기에 성공했다.
1948년에 ‘여성국극’이라는 장르가 시작됐고, 1949년에 <햇님과 달님>이라는 여성국극의 명작이 등장해 당시 최고의 흥행물로 자리 잡았다. 여성국극은 말 그대로 여성이 남성의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었다. 여성들은 무대 위에서, 남성들은 무대 옆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상황이었다. ‘여성국극 시대’에 유일하게 남녀 혼성의 창극으로 살아남아 크게 성공한 건 김연수가 이끄는 ‘우리국악단’이었다. 김연수는 어떠한 리더였을까? 그는 늘 자신만이 주인공을 독점하지 않았다. 홍갑수와 더블로 주인공을 맡았고, 오정숙과 같은 신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이런 활동 덕분으로 ‘국립창극단’(당시 ‘국립국극단’)의 초대 단장을 맡게 됐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에서는 살리에리가 역사의 뒤편에 존재하지만 임방울과 김연수의 관계에서는 ‘반전’이 있었다.
임방울은 어땠을까? 그의 인기는 계속됐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예전과 같지는 않았다. 김연수가 ‘창극’으로 인기를 구가할 때, 임방울은 ‘온리 원’의 형태인 판소리로 고군분투했다. 역시 ‘국창國唱 임방울’ 이라는 말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 행렬이 증명한다. 1961년 3월 13일 치러진 임방울의 장례는 유명하다. 서울 종로거리에 예전 상여가 등장했다. 많은 국악인이 임방울의 죽음을 애도했다. 김소희·박초월·박귀희 등 당대 최고의 여성 명창이 소복을 입고 나와 임방울이 떠나는 길을 상엿소리를 부르면서 예를 갖췄다.
1974년 3월 9일, 김연수 명창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바로 수제자 오정숙의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발표회가 있는 날이었다. ‘수궁가’를 완창했다. 스승이 타계하는 날, 제자는 스승이 가장 중시하던 소리를 한 것이었다.
1974년 3월 22일, 국립창극단의 ‘수궁가’가 무대에 올랐다. 고故 김연수 명창을 기리는 작품으로 단원들은 열과 성을 다했고, 관객과 평단 모두 크게 호평했다. 임방울의 역할은 남해성에게, 김연수의 역할은 조상현에게 이어졌다.
김연수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되지 않아서 또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명고名鼓 이정업이 뒤따라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그는 임방울과 김연수와 짝을 이룬 고수로 특히 유명했다. 당시 국악판에서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김연수가 천국에서 심심해서 이정업을 불렀다.” “임방울도 떠나고, 김연수도 떠나고, 이제 이정업이 북을 치고 싶은 명창을 따라갔다.”
저세상이라는 곳이 있다면 세 사람은 거기서 어땠을까? 두 사람은 역시 ‘선의의 맞수’가 돼 ‘수궁가’로 배틀을 하지 않았을까? 이정업의 북장단에 맞추면서.

글·사진 윤중강_국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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