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이야기
메신저로 대화할 때 이모티콘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아무리 말을 다듬어도 꼭 필요한 위로에 닿지 않을 것 같을 때, 기쁨을 간단한 말로 정리할 수 없을 때, 대화는 끝났고 더 할 말은 없지만 다 털어내지 못한 대화의 여운을 다시 한번 상대에게 전달하고 싶을 때 이모티콘의 힘을 빌린다. 요즘 가장 애용하는 이모티콘은 ‘마음적 거리 0cm’이다. 박준 시인이 출간한 시-그림책 《우리는 안녕》(난다, 2021)의 그림 작가 김한나의 작품이다.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 ‘한나’와 ‘토끼’가 손을 맞잡고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품어주는 32개의 이모티콘이 하나같이 착하다. 위로, 은근한 사랑, 연대, 우정, 용기, 서로가 서로의 기쁨… 그런 말을 대신해서 마음에 쓸만한 힘을 심어준다. 웹진 [비유] 49호 <쓰다>에 실린 윤성희의 <오늘은 예쁜 것만>을 읽고 한나와 토끼가 떠올랐다.
웹진 [비유] 49호 포스터
언니는 재수 없는 일이 생기면 몇 분 안에 기분 좋아지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 더 나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언니는 내 손을 잡고 매일 등교를 시켜주었다. 그때 언니는 열일곱 살.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는 아침마다 울었다. 술에 취한 아빠가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냈기 때문에 운 게 아니었다. 언니가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 울었다.
윤성희 <오늘은 예쁜 것만> 부분
이야기의 시작은 불길하다. 언니의 수술이 있는 날 아침, 주인공은 이를 닦다가 칫솔이 부러져 입안을 조금 다친다. 그러나 언니가 가르쳐준 대로, 조금 나빴던 일이 하루를 덮쳐 큰일이 되지 못하도록 주인공은 치약으로 거울에 크게 웃는 얼굴을 그린다. 언니 곁을 지키러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예쁜 것만 보고 나쁜 기억은 잊으려고 애를 쓰는 주인공을 지켜보는 마음이 내내 조마조마하다. 그가 수시로 꺼내 드는 기억이 언니에 대한 애정만큼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중한 인형을 잃어버린 기억, 유년의 아픔을 애인에게 뒤집어씌우며 못나게 굴었던 날들, 엄마의 죽음, 폭력적인 아빠, 그리고 어린 주인공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언니와의 이별까지. 언제든 과거의 슬픔이 수술을 앞둔 언니와 오늘 하루가 무사하길 바라는 주인공의 마음을 무너뜨릴 것만 같다.
손톱이 다섯 번이나 빠진 할머니가 이번에는 손을 뒤집어 바닥을 보여줬다. 엄지손가락 끝부분부터 손목까지 길게 흉터가 나 있었다. “낫에 베어서 이렇게 됐지. 오래되어서 이제 희미해졌네.” 할머니는 왼손 검지로 흉터의 선을 따라 그었다. 그러자 오른쪽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내 쪽으로 몸을 숙여 흉터가 있는 손바닥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중략) 그러자 이번에는 낫에 손을 베인 할머니가 강도에게 손을 베인 할머니의 손을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두 할머니가 서로의 손을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윤성희 <오늘은 예쁜 것만> 부분
주인공을 사이에 두고 앉아 할머니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소란하고도 정숙한 지하철 안에서, 어떤 시끄러움이나 침묵에도 아랑곳없이 이어지는 두 노인의 불행한 과거 이야기가 주인공의 마음을 달래고 독자를 위로한다. 분명 처음 만난 사이인데, 할머니들이 조곤조곤 털어놓은 각자의 삶은 서로 너무나 닮아 있었다. 가정 안팎의 노동에 파묻혀 자기를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던, 여자의 고된 삶을 다 살아낸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기에 오랜 친구 같다. 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아는 것, 그 마음의 연대는 서글프면서도 착하고 힘이 세다.
어린 주인공을 폭력적인 아빠에게 남겨두고 떠난 언니와, 그런 언닐 사랑했던 만큼 ‘나’를 떠나버린 그를 죽도록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은 “안 보여서 다행”인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에 구구절절 말이 덧붙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둘은 어느덧 ‘한나’와 ‘토끼’처럼, 서로를 위로하는 따뜻한 순한 품이다.
글 김잔디 [비유]편집자 | 사진 제공 웹진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