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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2월호

배우 장영남 자신을 믿고 자분자분 걸어가기

2022년 1월 11일 저녁. 평일임에도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은 관객들로 조용한 활기를 띠었다.
연극 <리차드3세>의 올해 첫 공연일이었다. 2018년 초연 이후 4년 만의 공연이자 리차드3세 역의 황정민 배우를 비롯한 쟁쟁한 연기자들의 원 캐스트 공연으로 알려져 기대감이 높았다.
틈 없이 쏟아지는 대사와 한눈팔 수 없게 만드는 연기로 꽉 채운 100분. 폭주하는 리차드3세도 압도적이었지만 시종일관 그와 대립하며 팽팽한 긴장의 한 축을 담당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리차드3세의 형수 ‘엘리자베스 왕비’ 역을 맡은 장영남 배우였다.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대중과의 접점을 넓혀온 그는 무대에 대한 긴장과 설렘 어느 한쪽도 숨기지 않는다. 여전히 연기가 좋고,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그럼에도 자신을 믿고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배우. 유연한 듯 단단한 배우 장영남을 만났다.
‘둥지’로 돌아오다

장영남 배우가 무대로 돌아왔다. 2018년 연극 <엘렉트라> 이후 4년 만이다. 언젠가 한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장영남에게 연극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둥지”라고 답한 그에게 이번 무대는 오랜만의 귀향인 셈이다. 지난 4년간 그가 출연한 작품은 드라마 10편 이상, 영화까지 더하면 해마다 평균 3~4편씩이다. 극단 ‘목화’ 시절부터 탄탄하게 다져온 연기력과 특유의 성실함으로 관객에게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 잡은 그이지만 코로나 시국에 무대에 선다는 것은 사실 적잖이 낯선 경험이었다. “연습부터가 녹록지 않았어요. 대본 리딩은 물론이고 무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계속 마스크를 착용하거든요. 연극 연습할 땐 호흡을 크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 초반엔 마스크가 방해되고 힘들었죠. 또 배우끼리 얼굴을 보고 익히면서 연습해야 하는데, 만난 지 오래되지 않은 분들도 있어서, 무대에 오르기 전에 “얼굴 좀 보자”고 확인하고 공연에 들어갔어요.(웃음) 첫 공연 땐 은근히 낯설더라고요.” 그럼에도 그는 27년 차 배우의 노련함을 무대 위에서 유감없이 드러냈다. 주인공 리차드3세가 온갖 권모술수로 형 에드워드4세(엘리자베스 왕비의 남편)는 물론 그 아들인 에드워드5세까지 살해하는 가운데, 끝 모를 비통함 속에서도 리차드3세에게 설욕을 다짐하는 엘리자베스의 강인함을 선 굵게 표현해 대립의 긴장감과 무게중심을 묵직하게 잡아간다. 감정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큰 눈 때문일까. 국정원 최초의 여성 차장(드라마 <검은 태양>), 대권을 노리는 야심가 법무부 장관(드라마 <악마판사>), 믿음직한 수간호사와 살인자의 두 얼굴을 지닌 사이코패스(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악마에 빙의된 주부(영화 <변신>)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그는 기가 센 캐릭터를 유난히 많이 연기해 왔다. 어느 역할이든 늘 상당한 에너지를 들였을 터. 그러나 연극을 준비하며 쏟는 에너지는 방송이나 영화에 비해도 무척 큰 편이라고.
“큰 극장을 커버해야 하니 목소리 톤도 더 높여야 하거든요. 셰익스피어 원작의 문장을 현대에 맞게 각색했지만 입에 쉽게 안 붙는 문어체 말투여서 드라마나 영화보다는 힘이 많이 들죠. 그래도 배우 입장에서 이런 연기가 주는 희열도 커요. 무대 작업은 긴장을 많이 하게 되지만 연기를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부도 되고, 새로운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거든요.” 사실 장영남 배우에게 <리차드3세>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4년 그는 같은 극장에서 ‘앤’ 역을 맡아 열연한 바 있다. 17년 남짓의 시간차. 그사이 그는 ‘대학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 로 성장했고, 영화와 드라마로 연기 영역을 넓혀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의 엄마가 되는, 개인사의 굵직한 사건도 있었다. <리차드3세>라는 한 작품에서 앤의 장영남이 엘리자베스 장영남이 되는 건 그러한 변화를 체감하는 일이 아닐까. 실제 <리차드3세>의 서재형 연출이 강조한 것은 ‘어머니’로서의 엘리자베스였다. 장영남 배우 역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이기에 그런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고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른다는 건 배우로서 성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일과 가정, 여자와 엄마라는 틀 안에서 갈등을 겪으며 여러 가지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있으니 예전과 많이 달라졌겠지요. 한 작품에서 다른 역할을 맡아 다시 공연하는 건 <리차드3세>가 유일한 것 같은데, 셰익스피어 작품들이 저에게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습니다.”

무대 작업은 긴장을 많이 하게 되지만
새로운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죠.

연극 <리차드 3세>에서 엘리자베스를 연기하는 장영남 배우

연극을 키우는 공간이 오래 남길 바라는 마음

장영남 배우는 2020년부터 서울문화재단 비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제안을 받고는 “배우로서 연기 외에 평소 잘 알지 못했던 문화예술 분야를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흔쾌히 참여하게 됐다고. 그 이전인 2019년에는 서울메세나지원사업으로 진행된 엉뚱한 사진관 프로젝트 ‘리메이드 인 서울’에 인터뷰이로 목소리를 보탠 바 있다. ‘서울에서 경험한 회복의 기억’을 주제로 작은 극복기를 인터뷰하고 사진을 촬영하는 프로젝트였는데, 그 결과물의 전시가 옛 동숭아트센터(현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 1층에서 열렸다. 2년간의 정비 후 지난해 문을 연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에서는, 올해 7월 극장 ‘쿼드’의 개관을 앞두고 있다. 장영남 배우는 재단의 이사로서, 연극을 ‘둥지’라 일컫는 배우로서, 그리고 그 둥지를 사랑하는 관객으로서, 새 극장에 거는 기대를 밝혔다.
“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을 여러 번 했어요.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했고, 장진 감독님의 <택시드리벌>과 <서툰 사람들>도 소극장에서 오래 했죠. 대학로의 중심에 있는 극장이었고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곳이어서, 그곳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많이 속상했는데, 다행히 리모델링 후에도 극장으로 살린다는 소식에 다행이다 싶었거든요. 많은 사람이 대학로 연극의 뿌리를 잊지 않게, 좋은 공연을 만날 수 있는 극장으로 계속 남으면 좋겠어요.”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곳, 바로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이하 ‘남산드라마센터’)였다. 서울예대 연극과 시절 그에게 남산드라마센터는 안방이나 다름없었을 터. 밤낮없이 연습하고 공연을 올리던 때를 떠올리며, 그는 말 그대로 ‘소름 돋는’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줬다.
“남산드라마센터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밤에 극장에 남아서 연습하면 중절모 쓴 남자 귀신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학생들 사이엔 그게 극장을 처음 설립한 동랑 유치진 선생이라는 얘기도 있었죠. 재밌는 건, 그 귀신을 만나면 잘된다는 거였어요. 어느 날 여자 동기가 수업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는데, 저쪽에 중절모 쓴 남자가 앉아서 ‘영남아, 영남아!’ 불렀다는 거예요. 정작 저는 못 들었는데 말이죠.”(웃음)과연 헛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대학생 시절 귀신의 부름을 받은 배우는 훗날 ‘연기의 신’으로 불리게 됐다. 캐릭터를 대하는 열정, 극장에 대한 애정이 여전한 채로 말이다. “남산드라마센터는 굉장히 유서 깊은 극장이에요. 그곳도 오래오래 함께 남아 있으면 좋겠어요. 연극 무대로서의 본질이 유지되면 더욱 좋겠고요. 유럽에 가면 건물에 남은 총탄 자국 등 역사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어요. 사실 건물에 들어갈 땐 음산하고 무섭기도 한데, 시간의 기록으로서 그 자체로 위대한 가치가 있잖아요. 한국에서는 시간을 오래 겪은 공간을 없애는 경우가 많은데, 오래된 것들이 그 가치를 이어가며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니나가 되고 니나를 넘은 D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 그가 그동안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 기사를 찾아봤다. 인터뷰 속 10년 차 배우 장영남과 20년 차 배우 장영남은 여전히 해보고 싶은 작품이 많고 연기에 대한 갈증이 크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고, 2022년 <리차드3세>를 공연 중인 27년 차 배우 장영남 역시 놀라울 정도로 겸손함과 열정이 그대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1년 전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는 본인이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로 영화 <늑대소년>의 ‘순이 엄마’를 꼽았다. 관객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캐릭터보다는 그가, 또 우리가 아는 ‘가장 보편적인 엄마’에 가까운 게 순이 엄마였기 때문이다. 무대 밖에서 그는 초등학생 아들의 엄마로서 보편적 삶을 살고 있기에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통틀어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일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연극 <분장실>을 꼽았다. 극단 목화 시절 연기한 이 작품으로 그는 2001년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분장실>은 한 극장의 분장실을 배경으로 네 명의 배우 A·B·C·D가 각각 풀어놓는 연기 인생을 다룬 작품이다. 장영남 배우가 연기한 D는 C의 프롬프터prompter, 연극 공연 중 관객이 볼 수 없는 위치에서 배우에게 대사·동작 등을 알려주는 사람로, C가 극 중 맡고 있는 연극 <갈매기>의 니나 역에 무서운 집착을 보이는 캐릭터다.
“<분장실>은 제게 배우로서 큰 원동력이 된 작품이에요. D를 연기하며 ‘이 친구처럼 됐음 좋겠다’ 싶었던 캐릭터죠. 정신이 온전치 않은 친구인데, 그 계기가 자기가 너무 하고 싶던 배역을 못 맡아서였고, 니나 역 배우의 프롬프터를 하다가 결국 ‘내가 니나야’라고 착각하게 돼요. C에게 ‘내 역할이니 달라’고도 하고요.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집념이 강한 캐릭터여서 저도 그 친구로부터 많이 배웠어요.”
<분장실>의 D를 연기하고 그 역할을 아낀 배우 장영남은, D가 그렇게 맡고 싶어 한 체호프의 <갈매기> 속 니나 역을 실제 연기하게 된다. 2009년 출연한 <갈매기>에 대해, 그는 평소 하고 싶던 작품이었는데 욕심만큼 잘하지 못했다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했다. 사실 당시 그의 연기는 호평받았으며 연극 팬 사이에서도 장영남 배우의 니나는 지금까지도 ‘역대급’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나의 보호막을 잘 만들고, 즐기면서 오래오래
지치지 말고 잘 걸어가 보자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지치지 말고 나를 믿고 나아갈 것

인터뷰가 있기 며칠 전, 한국 문화예술계에 또 하나의 고무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오일남’을 연기한 오영수 배우의 골든 글로브 드라마 부문 남우조연상 수상 소식이었다. 2021년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에 이어 관록 있는 한국 배우가 세계적인 조명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자 언론이 들썩였다. 많은 일이 그렇지만, 특히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배우 생활을 오랫동안 지속하기란 아주 어렵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에서 장영남 배우 역시 선배 배우의 수상 소식에 감회가 남달랐다.
“두 선배님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정말 경이롭죠. 저는 요즘 들어 대사 실수를 할 것 같은 불안감에 밤잠을 제대로 못 이루기도 하고, 그렇게 저에 대한 확신이 사그라드는 걸 느껴요. 그런데 선배들을 보면 여전히 무대를 책임지며 연기를 하고 방송활동을 하시잖아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나이 들수록 힘들 것 같은데, 대사를 다 외우고 계속 공부하시는 걸 보면 정말 멋있어요. 어릴 땐 ‘원래 하는 연기이니 오랫동안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죠. 각자 아주 어려운 시간을 극복하면서 그러한 경지에 오를 수 있겠구나 느껴지거든요. 오영수 선생님을 보면서는, 이렇게 그분의 진가가 널리 알려져서 기쁘고 후배로서 큰 희망이 됩니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진 못하더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한눈팔지 말고 자분자분 나를 믿고 가보자 다짐하게 돼요.”
장영남 배우는 연극·영화·방송을 오가며 지금껏 거의 쉼 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왔고 그때마다 주어진 캐릭터에 적확한 얼굴로 끊임없이 변신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여전히 많은 그를 이제 후배 배우들이 롤 모델 삼기도 한다. 특히 입체적이고 다양한 세대·배경의 여성 캐릭터를 찾기가 쉽지 않은 콘텐츠 환경에서, 온전히 자기 몫을 해온 그의 활동은 아주 중요하다. 후배들에게 건네는 이야기와 그 스스로 하는 다짐이 꽤 닮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후배들에게 저는 그저 먼저 태어난 사람일 뿐 결국 꿈꾸는 길은 같으니 동료라고 생각해요. 각자 열정과 치열함으로 이 길을 걷고 있을 거라 믿고요.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배우라는 일이 주변 환경이나 캐릭터 자체에 계속 치이고 늘 평가받는 일이다 보니, 채찍질도 필요하지만 자신을 토닥토닥 다독이는 것도 정말 중요해요. 나의 보호막을 잘 만들고, 즐기면서 오래오래 지치지 말고 잘 걸어가 보자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의 롤 모델은 헐리우드의 독보적인 배우 틸다 스윈튼. 전형적이지 않은 역할을 맡고 소화해 왔다는 것, 홀로 빛나기보다 다른 캐릭터와의 앙상블 속에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 그리고 여성 배우들의 역할이 한정적이던 오랜 시간 동안, 동분서주하며 활동 영역을 넓힌 배우라는 점에서 장영남 배우는 그의 롤 모델과 닮았다. <리차드3세>로 문을 연 2022년, 그의 활동 계획에는 “평소에 꼭 같이 작업해 보고 싶던 감독님과 함께할 기회”도 포함돼 있다고. 설렘에 웃는 배우를 보며 언젠가 틸다 스윈튼과 그를 한 작품에서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 차이가 너무 많이 날 것 같다”며 겸손의 농담을 던지는 그는 유쾌하고 단단하고 행복해 보였다. 아마 30년 차, 40년 차 장영남 배우도 그럴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이아림객원 기자 | 사진 공간 느루 | 사진 제공 샘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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