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보존하고 기록하자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흔적 남기기’
과거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현대의 서울에서, 서울이 가진 시간의 깊이를 더하고자 도입된 ‘흔적 남기기’ 제도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사진❶ 세운 4구역에서 철거 날을 기다리는 1920년대 부설 추정 맨홀
2021년 4월호부터 12월호까지, [문화+서울]의 ‘서울 건축 읽기’ 코너에서는 5회에 걸쳐 오래된 오피스 빌딩, 맨홀, 고가도로, 명패 등 서울의 다양한 근현대 도시건축 유산을 돌아봤다. 이 모든 유산은 공통점을 하나 갖고 있다. 바로 국가나 지자체에 등록된 문화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운 좋게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겨진 경우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사라져도 어떤 제재도, 큰 주목도 받지 못할 처지에 놓여 있다.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서울시는 지난 2013년부터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을 발굴하고 보전하는 ‘미래유산’ 제도를, 재개발로 사라지는 근현대 유산을 보존하고자 하는 ‘흔적 남기기’ 사업을 도입했다. 그 결과 2021년 8월까지 총 483개의 도시건축 유산이 미래유산으로 지정됐고, 아파트 재건축 사업에서는 반포주공 1단지, 개포주공 1·4단지, 잠실주공 5단지에서 각각 1~2동씩을 남기는 재건축 계획안이 상정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반세기가 지나서야, 서울시 차원에서 근현대 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려는 계획이 비로소 막을 올린 셈이다.
흔적 남기기 사업의 위기
2021년 9월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서울시 건축위원회는 정기 심의에서 “노후 아파트 흔적을 남기는 박물관 계획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며, 옛 성동구치소 개발 계획에서는 산업화 시기 마지막 교정 시설로서 리모델링·보존이 예고된 감시탑의 철거가 확정됐다. 2021년 12월에는 비록 불발됐으나,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 개포주공 1·4단지의 흔적 남기기를 전면 철폐하고 현재 남은 옛 아파트 동을 허무는 안건의 상정을 예고했다. 보도를 통해 언급된 흔적 남기기 사업에 반대하는 이들의 논지는 ‘거주민과의 소통 부족’과 ‘사유재산권 침해’로 요약된다. 전자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실례로 흔적 남기기 사업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설유경의 연구 《도시 흔적 남기기 시민 공감대 형성 방안》에 따르면, 흔적 남기기 사업의 취지에는 동의하나 톱다운식의 서울시 행정 처리에 반감을 가진 거주민이 다수로 파악됐다. 나아가 해당 연구에서는 거주민의 의견 수렴을 통해 정말로 남길 수 있는 유산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당사자 면접 설문을 통해 밝혀냈다. 흔적 남기기 사업에 다소 불만이 있다고 해서, 전면 철폐만이 해결책이 아님을 이미 2018년에 연구로 밝혀낸 셈이다.
다른 반대 사유인 ‘사유재산권 침해’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2013~2015년도에 서울시 도시재생본부가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추가 용적률 인센티브 부여 등의 제도가 이미 절차적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다. 본래 도시를 구성하는 모든 건축물과 사유재산이 주변 사회 및 건조建造 환경의 맥락에서 비로소 그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흔적 남기기 사업을 통한 도시 공공성과 역사성의 보존은 개발 사업이 짊어져야 할 의무이다. 여기에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며 용적률 인센티브 혜택을 이미 부여받은 상황에서, 흔적 남기기 사업을 사유재산권 침해라고 할 수 없다.
흔적 남기기 사업의 위기는 아파트 재건축· 재개발 현장 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본지 2021년 4월호에서 다룬 바 있는 역사성을 가진 맨홀 또한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그 흔적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현재 재개발 정비사업이 한창 진행 중인 서울 도심의 세운 3·4구역은, 서울시의 법정 도시계획 실행 계획인 《역사도심 기본계획》(2015)에서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의 유산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보존이 이뤄져야 할 곳으로 명시돼 있음에도 보존 대상 건물의 외벽만을 단순히 부착식으로 보존하는 등의 ‘꼼수’ 남기기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운 4구역에 남은 맨홀 덮개(1920년대 부설 추정, 사진 ❶) 또한 공적 보존과 기록 절차는 이뤄지지 않았다.
서울의 도시건축을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러한 서울시의 모습은 일본의 사례와 대조적이다. 2010년대 후반, 도쿄 최초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아카바네赤羽 단지의 세 동에 대한 보존 여론이 조성된 이후로, 사업 주체인 일본 도시재생기구는 해당 거주 동 보존 활용, 국가 등록문화재 등재를 추진해 지난 2019년 7월 성공적으로 결실을 거둔 바 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2022년의 서울과는 대조된다. 흔적 남기기 사업은 특정 정치인의 독단적 주장으로 시작된 제도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일본의 사례는 물론이요,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보존형 주거 재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대전광역시와 전주시에서 유사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대 도시인 서울에서 흔적 남기기 사업을 ‘철폐’하는 일이 과연 용납돼도 괜찮을까. 2022년은 서울의 도시건축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듯하다.
- 글·사진
- 김영준 도쿄대학 공학계연구과 도시공학전공 박사과정, 인스타그램 @서울의현대를찾아서 운영자
- 참고 《도시 흔적 남기기 시민 공감대 형성 방안》(설유경, 서울연구원, 2018), 《매일경제》 “서울시, 흉물 논란 빚던 ‘재건축 흔적 남기기’ 재검토”(정다운, 2021.9.3.), 《해럴드경제》 “개포주공 1·4단지 전면 철거... ‘재건축 흔적남기기’ 백지화”(202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