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는 방관자였던 과거에 대한 참회록
웹툰 《D.P 개의 날》을 드라마로 각색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의 인기가 많아 김보통 작가는 요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드라마 <D.P.>의 인기를 실감한다”면서 “국내외 언론사와 방송에서 인터뷰나 출연 요청이 많아 한동안 전화를 받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 김보통과 현실의 저를 분리하고 활동하고 있어 실생활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다” 고 말했다.
《D.P 개의 날》은 군 복무 시절 DP병으로 근무하며 탈영병을 쫓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웹툰과 드라마에서 설명되듯 DP병은 탈영병 체포를 위해 민간인처럼 머리를 기르고 부대 밖에선 평상복을 입는다. “대체로 부유한 집안 출신의 병사들이 DP병으로 차출되는데 앞선 근무자들이 8개월 내내 탈영병을 한 명도 체포하지 못하자 ‘이번엔 제일 가난한 애를 뽑아보자’ 해서 제가 뽑혔어요. 대학생이고 권투를 한 이력이 도움 됐죠. 사비를 쓰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던 이전 DP병과 달리 저는 부모에게 손을 벌릴 수 없어서 쥐꼬리만 한 활동비를 아껴가며 굶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탈영병을 추적했습니다. 제가 잡은 탈영병은 20명 정도였는데 실적이 좋아 표창도 받았죠.”
<D.P.>는 유쾌한 코미디이자 흥미진진한 수사극이면서도 한편으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을 다룬 드라마이자 폭력을 방관한 자신에 대한 참회록이기도 하다. “부대 안에 있을 땐 늘 밤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밤마다 고참이 후임을 깨워 군복을 빨게 하고 전투화를 닦게 하며 잠을 못 자게 하는 일상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점호가 끝난 뒤 탈영병 발생 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부당한 가혹행위에 맞서기보단 당장 면피하는 것만 바라던 제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부끄럽습니다.”
<D.P.>가 공개된 뒤 한동안 논쟁이 일기도 했다. ‘요즘 군대에선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 같은 폭력은 거의 없다’는 주장과 ‘아직도 어딘가엔 변함 없이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국방부까지 나서 해명하기도 했다. 그는 “작가의 역할은 사람들이 미처 관심을 갖지 않는 현실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작가의 질문에 많은 이가 반응을 보이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상황은 제가 가장 바라던 것”이라고 말했다. DP병 근무 경험은 그를 어떻게 바꿨을까. “어머니가 ‘군대 가기 전엔 말도 잘 듣고 착한 애였는데, 군대 가서 DP병을 하더니 애가 좀 이상해졌다’라고 하시더군요. 구체적으로 설명은 안 하셨지만, 개인적으론 아무리 막연한 일이라도 일단 해보고 안되면 깔끔히 포기하는 성격이 된 것 같아요. 핵심은 안 해봐도 알 만한 것까지 굳이 해보고 ‘정말 안 되는지 확인한다’입니다. 어쩌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DP병 시절 경험하고 배워서였을까요? 그래서 제대 후 정말 많은 일을 해봤고 안 된다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에 둔감한 사람이 된 것이겠죠.”
작가의 질문에 많은 이가 반응을 보이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상황은 제가 가장 바라던 것입니다
《D.P 개의 날》 중 한 컷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회사원 시절을 거치다
올해로 데뷔 9년 차인 김보통 작가는 만화를 그리던 초창기만 해도 대기업을 다니다 만화가로 변신한 것으로 유명했다. 대기업 회사원 출신 만화가라니, 이 사실만 놓고 보면 학창 시절 상위권을 놓치지 않은 엘리트 학생이었을 것 같지만 뜻밖에도 문제아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그의 자리는 교탁 앞도 아닌 교탁 바로 옆이었는데 사실상 격리 조치에 가까웠다. 당시 그는 반에서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유일한 아이였다. 수업 중 앉은 자리에서 소변을 보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글도 모르면서 수업 시간에 만화책을 꺼내 읽는 괴짜이기도 했다. “방앗간을 하시던 부모님이 저를 붙잡고 공부를 시킬 여유가 없으셨죠. 제 이름 석 자밖에 쓸 줄 몰랐어요. 그때 아버지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만화 잡지 《만화왕국》을 사주셨어요. 허영만 선생님의 《날아라 슈퍼보드》가 인기였는데 아무리 그림을 봐도 내용을 모르니 재미가 없더라고요. 덕분에 얼렁뚱땅 한글을 배웠죠. 2학년이 돼서야 글을 깨우쳤어요.”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상황이 썩 좋아지진 않았던 모양이다. 중3 땐 담임 교사에게서 “넌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도 가지 못할 것”이란 악담을 들었고, 고등학교 땐 자퇴하란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경제적 지원을 해줄 수 없다는 부모의 반대로 인문계 고교에 진학했다. 그 후엔 일부러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귀여운 반항이었죠. 하지만 그림을 안 그린다고 해서 괴롭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딱히 그림이 내 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 아쉬운 마음도 없었어요.”
김보통 작가의 웹툰과 에세이는 대체로 따뜻하고 낙천적이다. 하지만 10대 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란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비관주의자이자 패배주의자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사태로 부모가 운영하던 방앗간이 쫄딱 망해 암울하던 시기였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다”는 아버지의 말대로 평범한 삶을 택했다. 고교 시절 도서관근로장학생으로 일해 도서관이 친숙하다는 이유로 문헌정보학과를 선택해 대학에 진학했다. 서울의 상위권 대학을 졸업하곤 아버지의 바람대로 대기업에 취직했다. 집에 남은 빚을 갚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금융 위기로 취업이 어렵던 때라 주위에선 성공했다며 축하해 줬다. 그 역시 희망찬 미래를 향해 쭉 뻗은 길을 힘차게 나아가기 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근무 시간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도 추가 수당은 없었고, 회식에 빠지면 욕을 먹어야 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할 수 없는 삶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암이 재발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아버지가 호스피스 병동에 옮겨져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회식 자리에 나가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억지로 마셨다. 그는 “아버지 곁을 지키지 못하고 건배를 해야 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비참했다”고 회상했다.
회사는 무자비했다. 상사 중 한 명에게선 “세상 모든 아빠는 다 죽어. 우리 아빠도 죽었어.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알아야지. XX새끼야”라는 막말까지 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회사를 그만둘 수 없었다. 아들이 대기업에 다니는 걸 보는 게 아버지의 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회사를 다니다 언젠가 암에 걸려 죽느니 차라리 나머지 시간만큼은 멋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가장 하고 싶던 일은 자고 싶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것,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안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어느 정도 이뤄 다행입니다.”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며 만든 《아만자》로 데뷔하다
애초부터 만화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퇴직 후 DJ를 해보려 시도했고, 작은 도서관을 차려볼까 생각했다. 로스쿨 준비도 했지만 불합격했다. 만화가가 된 건 우연이었다. 트위터를 하다 관심받고 싶어 사람들의 프로필 그림을 그려준 일이 계기가 됐다. 퇴사 1년 만의 일이었다. “당연히 잘 그리지 못했어요. 못 그리는 쪽에 더 가까웠죠. 하지만 꾸준히 했어요. 그래서 관심을 받은 듯해요. 아무리 봐도 밥 벌어 먹고살 실력은 아닌데 계속 그림을 그리니 걱정 반 응원 반으로 지켜봐 주셨던 것 같아요. 때마침 만화를 그려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와서 올레마켓에 연재를 시작했어요. 울며 간장 먹기였죠, 겨자보단 먹기 쉬운.” 처음엔 회사원 이야기로 만화를 그려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릴 수 있겠다 싶었지만, 막상 그리려니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라 도저히 그릴 수 없었다. 그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회사를 다니며 늦게까지 일하고 회식에 참석한다는 핑계로 돌아가시는 길에 함께하지 못했기에 만화를 그리면서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담당자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이런 걸 누가 보겠나?” 그의 생각도 딱히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 외엔 그리고 싶은 게 없었어요. 담당자는 ‘그러면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6개월만 그리자’라고 했죠. 연재가 처음이라 콘티도 없었고 그림 그리는 속도가 느려 대충 그리고 얼렁뚱땅 대사를 끼워 맞추는 게 다반사였죠. 무의식이었는지 초능력이었는지 운이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운이 좋게 《아만자》를 1년간 연재하고 상도 받았습니다. 마냥 좋았죠.”
청년 암환자의 병원 내 일상과 혼수상태에 빠져 겪는 환상을 때론 위트 있게 때론 가슴 아프게 그린 《아만자》는 2014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부천만화대상에서 인기상을 차지했다. 한 시상식 단상에 섰을 땐 앞 열에 그의 한글 스승이 앉아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만화가 김수정·이두호·장태산이었다.
《아만자》는 해외에서도 관심이 높았다. 일본 가도카와 출판사가 현지에서 만화책으로 출간했고, 미국 인터넷 언론 허프포스트에서 연재했다. 2015년 연재를 시작한 《D.P 개의 날》도 신선한 소재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이후 익명의 고민이 담긴 질문에 대한 상담 내용을 다룬 <내 멋대로 고민상담>을 선보였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고독이’는 그가 인터뷰 때 쓰고 나오는 대형 탈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들은 화려한 조명을 받진 못해도 나름의 행복을 찾으며
의미를 만들어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만자》 초기 콘티
소외된 이들을 동정이나 멸시의 대상이 아닌 주인공으로 묘사하다
김보통 작가는 사회성 짙은 만화를 그리는 게 특징이다. 군 내부 가혹행위를 다룬 《D.P 개의 날》이 그랬고,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사람의 사이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다룬 <질풍의 노도>도 그렇다. 이 중 <질풍의 노도>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의뢰로 그린 8회 분량의 짧은 브랜드 웹툰이다. 그는 이 작품도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연재를 하다 잠시 중단한 <사람의 사이로>는 어릴 적 사촌누나에게 들었던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쓴 것이고, <질풍의 노도>는 전교생이 10명 정도인 시골 분교를 돌아다니며 강연한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다.
주위에 자신이 만화가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별 뜻 없이 ‘보통’이란 이름을 쓰게 됐다는 그는 주로 소외된 보통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 봐온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나고 자란 동네는 연말이면 불우 이웃 돕기에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인데, 서울 사람들은 서울로 치지 않는 동네였죠. 이웃사촌 중엔 공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극빈층, 장애인, 이혼 가정 등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한밤중에 뒷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맞아 눈에 멍이 든 채 코피를 흘리며 저희 가족이 살던 단칸방으로 숨어든 기억도 납니다. 그런 사람들은 미디어에서 늘 불행하거나 동정받는 모습으로만 그려지죠. 그들은 화려한 조명을 받진 못해도 나름의 행복을 찾으며 의미를 만들어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조명을 비춰주고 싶었고, 그들을 동정이나 멸시의 대상이 아닌 주인공으로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김보통 작가는 나누는 삶을 추구한다. ‘열정페이’가 일상다반사인 웹툰 업계에서 보조 작가인 어시스턴트 직원을 고용하며 명확한 근무 시간과 임금, 4대 보험은 물론 상여금과 휴가비까지 명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남는 거는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돈을 버는 만큼 직원을 늘리고 있다. 고독이 캐릭터로 벌어들인 돈도 모두 기부하고 있다. 만화를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는 만화를 천직으로 생각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덜 싫어하는 일 중에서 할 만한 것이 만화”라고 말한 적도 있다. 작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진 몰라도 그의 천직은 이야기꾼이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하기”라지만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유일한 취미 생활이 망상하기”라는 그의 머릿속엔 늘 남들에게 전해줄 이야기로 가득하다. 지금도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그중엔 학교 이야기도 있고 회사 이야기도 있고 괴물 이야기도 있다. 웹툰은 물론 드라마 각본과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소재라 기대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제 작품 특유의 음울함을 좋아하시는 분에겐 그럭저럭 볼만한 작품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웹툰 외엔 뭐든지 하고 싶어요. 직원들 월급만 줄 수 있다면 정말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글 고경석 《한국일보》 기자 | 사진 제공 딜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