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

캄캄한 세상을 밝히는 어린 희망 <빌리 엘리어트> | 2021. 8. 31~2022. 2. 2 | 대성 디큐브아트센터

2000년 프랑스 칸에서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본 가수 엘튼 존은 부축을 받으며 나갔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그는 흐느꼈다. 평범함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 빌리의 투쟁, 부모가 바라는 아들에서 도망치는 모습이 어린 시절 자신과 닮았다고 했다. 스티븐 돌드리 감독은 그날 밤 엘튼 존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실현 불가능하다”며 거절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 북부 탄광촌의 한 소년이 발레를 하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이야기다. 1984년 광부들의 파업과도 얽혀 있다. 이 뮤지컬은 2005년 영국에서 초연했다. 2009년 미국에선 토니상 작품·연출상 등 트로피 10개를 받았다. 돌드리는 “엘튼 존과 그의 음악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성공”이라며 “나도 처음엔 회의적이었지만 배우를 모아 연습하면서 이 뮤지컬만이 가진 특별함을 봤다”고 말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춤이 탄광촌 소년을 어떻게 구원하는지 보여준다. 영화 <디 아워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연출한 돌드리는 그 배역(빌리)을 ‘마라톤을 뛰면서 햄릿을 연기하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어린 주연 배우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드문 작품이고, 능력의 한계까지 그를 끌어올린다.
영화는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아무 제약이 없다. 하지만 <빌리 엘리어트>를 뮤지컬로 옮길 땐 영화를 휴지통에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영화는 한 번만 잘 만들면 되지만 뮤지컬은 일주일에 여덟 번 공연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무가 피터 달링은 남자들이 일제히 걷는 마지막 장면의 안무부터 거꾸로 작업해 나갔다.
빌리는 말로 할 수 없는 것, 그렇다고 침묵할 수도 없는 것을 춤으로 표현한다. 발레가 빌리의 목소리와 같은 셈이다. 로열발레학교 오디션에서 “춤출 때 어떤 기분인가?” 물을 때 빌리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 뮤지컬은 빌리의 꿈 못지않게 가족과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광부들은 갱^坑처럼 캄캄한 무대에서 캡램프를 켠다. 빌리는 어두운 객석 통로로 걸어나간다. ‘시련의 극작가’ 아서 밀러는 “극에는 희망의 불꽃이 있어야 하고 등장인물 중 적어도 한 명은 사회의 진보를 믿는 낙관주의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는 경제적 파탄에 직면한 탄광촌 사람들에게 그런 희망의 동의어다.

연극 <리어왕>에 출연한 배우 이순재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 <리어왕> | 10. 30~11. 21 |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배우 이순재는 무대에 설 때마다 기록을 갈아치운다. 그가 이번엔 연극 <리어왕>에서 주인공 리어왕을 연기한다. 인간 존재와 인생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아우르며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이뤄진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한 작품이다.
영국 배우 이언 매켈런이 “형님!”이라고 부를 국내 최고령 리어의 등장이다. 연기 인생 65년을 맞은 이순재는 1934년생이지만 여전히 짱짱하다. 그는 “말년에 하고 싶어 미뤄둔 필생의 마지막으로 중요한 작품을 마침내 올린다”며 “문학적 원전을 압축하거나 비틀지 않고 3시간 20분 길이의 정통극으로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은 늙은 왕 리어가 세 딸의 애정을 시험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영토를 떼어주고 은퇴할 참이다. 그런데 두 언니의 애정 공세와 달리 막내 코딜리어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한다. 리어는 오만함 때문에 그 참뜻을 읽지 못한다. 비극의 시작이다. 거죽만 보면 상속을 잘못해서 벌어지는 이야기 같다. 하지만 관객은 ‘진실을 보는 눈이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 앞에 선다. 진실과 멀어진 리어는 결국 두 딸에게 배신당해 모든 것을 잃고 황야로 내몰린다. 점점 미쳐간다. 허허벌판에서 미치광이처럼 천둥과 번개, 비바람을 맞으며 비로소 직관을 얻는다.
이 연극은 원전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며 의상·분장까지 제대로 만든 작품이다. 단독 캐스트로 23회 공연에 모두 출연할 이순재는 “크고 작은 폭풍에 시달려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다고 리어가 후회하는 대목이 있다”며 “셰익스피어가 당시 상류층에게 던진 메시지였는데 요즘 관객에게도 어떤 펀치를 날릴 것”이라고 했다. 또한 “연극 <리어왕>은 절대 권력자가 노후의 안락을 위해 나라를 딸들에게 나눠주지만 결국 딸들에게 쫓겨나 버림받고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리어왕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생각한다. 모름지기 리더는 자기가 아니라 밑에 있는 사람, 어렵고 힘들고 가난한 사람의 고충을 안고 가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