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소통 가능성을 연구하다
올해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중에는 ‘가고 싶은 나라’, ‘다니고 싶은 학교’ 등 상상 속 공동체의 국기를 만들어보는 수업이 있다. 세계 각국 국기에 새겨진 해, 달, 별 등의 아이콘을 그래픽 프린트 교재 형태로 편집해서 나누어주면, 학생들은 본인이 상상한 나라나 교실의 이미지에 걸맞은 아이콘을 찾아 가위로 잘라내고 풀로 붙이면서 자신만의 국기를 만든다. 원색의 아이콘을 도화지에 배치하는 간단한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미술 시간에 흔히 느끼는 스트레스 없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아이콘에 연결시키며 작업에 빠져든다. 특히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참여한 수업에서는 아이들이 평소 국적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국기 만들기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완성된 작품을 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별’이라는 같은 모양의 아이콘을 사랑, 하늘, 평화 등 각자 다른 의미로 사용하거나 반대로 ‘사랑’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나무, 바위, 동물 등 각기 다른 아이 콘을 사용하기도 한다. 친구들의 작품에서 서로의 생각과 느낌, 이야기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방식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때, 학생들은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시각기호들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작업은 2006년경부터 시작했지만, 국기라는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의 일이다. 19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86 서울아시안게 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컬러TV로 지켜봤고, 올림픽 출전 선수들의 화려한 유니폼과 경기장에 걸린 형형색색의 국기들에 매료됐다. 그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세계화’, ‘지구촌’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휘황찬란함과 지구마을1 )의 인공수조 물길을 9인승 보트를 타고 구경하며 느낀 야릇함은 뇌리에 남았다. 그때의 기억으로 타 문화와 국적 관련 소재들을 이용해 창작 활동을 해왔다.
예술가의 작업 세계를 비전공자나 어린 학생들이 체험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변형하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작품 활동의 배경과 의도, 단계별 작업 과정과 결과물의 관계 등을 예술가 스스로 명확히 이해할 때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예술놀이 LAB은 TA의 창작 활동을 위한 별도의 연구 시간과 외부 연구 기회를 제공한다. 본인 작품 활동의 특정 맥락을 일반인들이 체험 가능한 조건으로 바꿈으로써 작품의 소통 가능성을 연구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TA는 본인의 창작 활동을 기반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연구를 통해, 예술가로서의 역량과 작업 세계의 가치를 입증하는 작업을 한다.
1) 에버랜드(당시 용인 자연농원)의 실내 놀이시설. 9인승 보트를 타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인형 650개와 색색의 램프 1만 3,000여 개가 채워져 있는 인공 수로를 관람하는 시설이다. 1985년부터 2015년까지 30년간 운영되었다.
1 2018 예술놀이 LAB 수업 장면.
2 윤윤상 TA의 ‘예술로 말하기: 내가 가고 싶은 나라’ 수업 자료.
3 수업에 참여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의 작품. “우리 교실은 구름 속에 있어요. 수업 시간에는 죽을 때까지 웃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워요!”
4 수업에 참여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의 작품. “공부하는 곳인데… 공부를 하려면… 우선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해요.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를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로 표현했어요.”
5 수업에 참여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의 작품. “환생하는 법을 알려주는 교실이에요.”
TA는 미술 교사가 아니다
TA는 미술 교사나 강사가 아니다. 내가 예술놀이 LAB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는 예술에 관한 지식이나 작품 제작을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과정이 없다. 이상한 점은 그럼에도 나와 학생들은 수업을 통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심지어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주 국기 만들기 수업은 지적장애를 가진 특수학급 중학생들과 진행했다. 한 학생이 붉은색 바탕에 2개의 해를 오려 붙인 본인 작품에 대해 “2개의 해는 각각 다른 반 친구들(일반학급)과 우리들(특수학급)”이라고 설명했다. 해 모양이 다른 이유는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수줍게 말했다. ‘상징’에 관한 해석과 더불어 타인과 공동체, 그리고 우리 사회의 소수자라는 맥락과 연결돼 순간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학생이 어떤 기분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들릴 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였지만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충분히 알고 있는 듯한 그 학생의 말과 작품은 수업이 끝난 후에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 학생은 내가 가장 최근에 만난 예술가다.
- 글·사진 윤윤상 칼아츠(CalArts)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했으며 타 문화와 지역성, 국경, 문화적 배경을 주제로 ‘이미지’와 ‘시선’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을 기반으로 장기 거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사진, 설치, 드로잉,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작업을 선보였다. 현재 서서울예술교육센터 TA로 활동하며 ‘2018 예술놀이 LAB’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