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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5월호

2 5 0 년 서 커 스 의 역 사
‘서커스’라는 장편소설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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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커스는 탄생 250주년을 맞았다. 원형 공연장에서 말 타기 묘기와 곡예를 선보이는 쇼에서 출발한 서커스는 광대와 야생동물 등을 쇼에 등장시키면서 더 큰 인기를 얻었으며,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등장한 천막 극장은 서커스의 형식과 공간의 확장을 가져왔다. 오랜 역사와 함께 변화해온 서커스는 오늘날 다양한 장소, 공연예술 축제등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기예와 예술의 융합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5월 ‘테마 토크’에서는 서커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서커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서울의 봄을 찾아온 서커스를 즐거이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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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커스의 탄생

18세기 런던의 극장은 늘 사람들로 붐비며 술이 가득했다. 또한 범죄의 온상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극장은 대중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1700년대 왕과 귀족들의 후원이 줄어들면서 입장권을 살 수 있는 일반 대중들이 왕과 귀족의 역할을 대신했다. 그들은 드루어리 레인이나 코벤트 가든 등에 있는 거대한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이러한 극장들은 수천 명의 관중들을 수용했는데, 부자들은 독립된 공간에 앉았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은 구역별로 나뉜, 의자 없는 공간을 이용했다. 이곳에서 주로 외설적인 노래나 환호, 구호 등이 터져 나왔고, 대부분의 언쟁도 이곳으로부터 시작되어 종종 폭동으로 번졌다. 싸움이나 빽빽한 공간, 머리 위 샹들리에에서 떨어지는 촛농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극장은 훌륭한 저녁 외출 장소였다.
1760년대 후반, 애슬리 부부는 극장의 단골이었다. 전직 군인이 자 승마 전문가였던 필립 애슬리는 민간인이 된 이후 아내 패티와 함께 램버스 마쉬에 승마학교를 차려 아침에는 승마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말 타기 묘기를 시연했다. 이는 곧 큰 인기를 끌었고, 애슬리 부부는 관객들이 더 훌륭한 말 타기 묘기를 볼 수 있도록 웨스트민스터 브리지에 두 번째 공연 장소를 마련했다. 부부에게는 입장료를 걷는 방식의 변화와 함께 런던의 큰 극장으로 관객을 불러 모을 호객꾼들이 필요했다.
한동안 극장에서는 드라마틱한 공연 사이에 짧게 쉬어가는 형태로 광대, 곡예사, 외줄타기 등을 배치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러한 형식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배우이자 진행자인 데이비드 개릭과 같은 인물들의 영향으로 극장은 진행자의 역할을 점차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개릭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변형시키지 않기 위해 저항할 것이라고 천명하며 연극 훈련에 매진했다. 그보다는 약한 순수주의자이며 동시에 실용주의자였던 애슬리 부부는 이러한 변형이 가장 큰 박수를 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여러 공연을 모아 원형 공연장에 배치하고, 곡예와 말 타기 묘기 등을 혼합한 (현재 우리가 최초의 서커스라고 이야기하는) 쇼를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10여 년간 유럽의 여러 도시로 사업을 확대해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쟁자와 모방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서커스 역사는 막대한 자금과 산업을 움직이는 거대한 기업의 이야기이자, 파산과 화재, 내분으로 분열된 회사들의 이야기이며, 엄청난 돈을 벌고 또 날려버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슬리 부부의 회사는 화재로 두 번이나 재건되었다. (재건 비용은 약 3만 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450만 파운드였다.) 애슬리 부부의 사업은 비록 다음 세기에 생겨난 대규모 천막 서커스의 영향으로 규모가 축소되긴 했지만, 대중들의 선호가 엄청났기에 거듭되는 화재 속에서도 꽤 오랜 기간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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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애슬리가 만든 특별한 형식

서커스가 어떻게 그런 강력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핵심은 애슬리가 시각적인 연출을 최우선으로 하여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표현 언어를 구축했다는 점이다.그것은 신체적인 행위로서(실제로 고급 로맨티시즘과 얼굴에 대한 집착으로 고급 예술이 발전하기 시작한 당시에도 신체적인 행위를 이용했다.) 실제적이었으며(힘, 재주, 기술 등의 몸짓이 관객의 시선이 닿는 원형의 공간에서 실제로 펼쳐졌다.) 다채로웠다.(다양한 훈련법과 공연 방식 등은 연령과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어 관객에게 감동을 주었다.)
애슬리는 이렇게 역사의 흐름을 사로잡은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가 승마학교를 세웠던 시기에는 산업혁명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그의 수명이 다할 즈음 서커스는 소득 및 인구 증가라는 거대한 물결에 올라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형식 자체로 시대의 영웅성과 인류 진보의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서커스 공연장은 과학의 혁신에 대한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장소가 되었다.(실례로 전등이 발명된 초기에는 큰 전구 하나만으로도 공연의 볼거리가 충분했다.) 서커스는 관객들이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만들어가는 힘을 체험하게 하며 그들의 문화의식으로 깊이 자리 잡았다.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브리지 로드에 있는, 애슬리 부부의 서커스 극장 자리는 성 토마스 병원의 일부분으로서 남아 있다. 그들이 남긴 유산은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과 기록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기념일이 되면 그 유물들을 다시 꺼내 과거를 재현하고픈 유혹이 생기지만, 애슬리 부부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다. 이는 또한 서커스의 심오한 힘에 충실하지 않은 행동일 것이다


현대 서커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들

우리가 말하는 ‘현대 서커스’는 1970년대 전통적인 서커스와의 철저한 단절(일종의 후기 근대주의 혁명)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지만, 그럼에도 애슬리의 DNA를 공유하고 있다. 여전히 신체적이고, 여전히 실제적이며, 여전히 다채롭다. 서커스는 지금도 보편적 표현 언어로서 막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예술적인 형태로 크게 확장되었다. 서커스는 여전히 경이로운 것에 가장 중점을 두지만, 대부분 애슬리가 대중화시킨 여러 개의 쇼를 결합한 형식에서 벗어나 있으며, 천막이나 원형 공연장이 아닌 다양한 공간에서 펼쳐진다.
현대 창작자들 중에서는 건축적인 공간 구성을 이용하여 형태만으로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프랑스의 공연 연출가 오레리앙 보리 같은 인물이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Sans Objet>는 인간의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복잡한 상관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두 명의 아크로바트 배우와 한 대의 산업 로봇(1970년 조립 라인에서 사용했던 큰 기계의 팔 부분)을 무대에 세운다.(우연하게도, 공장 시대의 시작을 맞이했던 애슬리 부부의 관객들도 공감할 만한 주제이다.) 또한 트랜스젠더 아티스트 피아 메나르는 곡예로 다룰 수 없는 물질(바람이나 얼음 등)에 대한 연구를 오랫동안 진행하며 전이와 변화의 상태를 표현하고자 한다. <P.P.P>는 공중에 매달린 90개의 얼음 구체가 산발적으로 녹으면서 흘러내리거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연출한 작품이다. 모로코의 대형 아크로바트 그룹 Collectif Acrobatique de Tanger는 가정생활의 복잡한 구조를 반영하거나 메디나의 컬러풀하고 균열된 거리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만든다.
서커스는 다른 컨템포러리 아트와 협업도 시도하고 있다. 영국 그룹 Gandini Juggling은 왕립발레단과 함께 <4×4>라는 작품을 제작했으며, 호주의 Circa는 대성당에서의 공연을 위해 중창단 I Fagiolini와 협업했다.이외에도 무용수, 극작가, 과학자, 영화제작자, 화가, 조각가 등과 협업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도 물론 옛것의 정신을 상기시키는 부분이 있다.애슬리 부부는 언제나 무용수, 사기꾼, 새 조련사, 영특한 동물, 음악가와 가수 등에 열려 있었다.)
모든 기념일은 미래와 과거를 볼 수 있는 기회이다. 현대 서커스가 시작된 지 50여 년이 지났다.이는 필립 애슬리가 최초로 서커스를 만든 시기부터 1814년 겨울, 관절 질환으로 파리에서 사망한 날까지의 기간과 비슷하다. 오래전의 서커스가 그랬듯이, 현대의 서커스도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성장했다.오래전의 서커스가 그랬듯이, 지금의 서커스 역시 보편적이며 중요하며 필요한것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변화하는 세상, 라이브 공연과 체험을 통한 공유, 더 이상 영웅적이지 않지만 변화하는 복잡한 자아를 담고 있는 현대의 몸,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심도 깊은 철학적인 질문과 중대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이 시점에 ‘리얼리티’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과거는 프롤로그이다. 그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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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존 엘링스워스 원래 스마트 캐주얼한 캐릭터였지만 지금은 빈티지한 캐릭터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본인 스스로는 가슴이 아플 만큼) 거의 완벽하게 스마트한 기능은 사라져갔다. 작가이자 <Total Theatre Magazine>의 에디터이며 ‘Sideshow’의 운영자이다.
그림 이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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