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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5월호

그림으로
벚꽃엔딩

“더위가 너무 빨리 찾아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해마다 이 말을 하는 시기가 빨라지는 것 같다. 분명 3월 마지막 주에는 제법 쌀쌀해서 두툼한 옷을 챙겼건만, 며칠이 지나니 거짓말이라도 하듯 콧잔등에 땀이 제법 송골송골 맺히더라. 우스갯소리로 4월을 벚꽃 연금 시즌이라 하는데, 올해는 연금 개시 기간이 짧았다고 한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지는 날이 점점 짧아지는 게 이리 아쉬워질 줄 몰랐다.

그러나 이러한 헛헛함을 상쇄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그림이다.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 이상 그림 속 대상은 꽃비가 내리든 봄비가 내리든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은가. 어떤 때는 그림이 캔버스 밖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분위기를 미화하기도. 그래서 준비했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이 빚어내는 황홀함과 그림이 주는 간간함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5월의 콘텐츠 여행.

첫 번째 장소는 평창동 ‘화정박물관’. 평창동은 도심 속 쉼터다. 다소 불편한 교통만 감내하면, 눈과 코가 편안해지는 동네에 들어설 수 있다. 일 년 내내 녹음이 우거진 건 기본.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보이는 북악산과 북한산은 시간에 맞춰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봄의 붉은 철쭉과 가을의 주황빛 단풍은 매혹 그 자체다. 시내보다 숨쉬기도 수월하다. 백사실계곡부터 북악 팔각정까지 걸어서 50분이면 충분한데, 그동안 평소 먼지에 지친 코에 휴식을 줄 수 있다. 팔각정 앞에 펼쳐진 서울 경관은 탄성이 절로 나온다. 파노라마 뷰에서 용의 꿈틀거림이 떠오른다. 개인적으로는 거친 기운을 뽐내는 인왕산 방향이 멋있다. 선조들이 인왕산을 왜 수묵화에 옮기려 했는지 이해가 된다.

여운을 간직하고 싶다면, 백사실계곡으로 돌아와 근처 화정박물관에서 《고인물전古人物展》(6월 30일까지)을 감상해보자. 한·중·일 초상화와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역사적으로 업적이 뛰어난 인물의 일화를 그린 그림), 일본의 우키요에 등을 만날 수 있다. 예스러운 감정을 이어나가기에 제격이다. 전시는 한국과 중국의 초상화를 비교하는 것에서 시작해 옛사람들이 지향했던 고결하고 청렴한 인물의 삶을 묘사한 작품, 신선과 승려의 신기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 대중에게 인기 있던 문화를 그림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마무리된다. 김기창의 <상산사호商山四皓>1970, 장원의 <절애관송도絶崖觀松圖>20세기, 채용신의 <숙부인 황씨 초상淑夫人黃氏肖像>20세기 초, 프랑스 풍자만화가였던 프라이Pry의 석판화 <조선의 황제>1899 등이 눈길을 끄는데, 이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과 시대상·지역상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중간 기착지는 수하동의 ‘KF갤러리’다. 온통 빌딩만 있어 의아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에선 거리의 모습과 소개할 작품이 중첩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청계천은 서울 시민의 안식처로 불린다. 직장인에게는 사막 속 오아시스와 다름없다. 점심을 먹은 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청계천을 걸으면서 마주하는 자그마한 폭포와 수풀, 새와 버들치의 어울림은 여백을 살린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이 장면을 청계천 옆에 서 있는 빌딩에 올라가 바라보면, 점·선·면으로 이뤄진 패턴처럼 다가와 초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현재 KF갤러리에선 폴란드 사진작가 마르친 리체크Marcin Ryczek의 개인전 《조화》(5월 24일까지)가 진행되고 있다. 인간과 자연, 평화를 주제로 하는 그의 사진 특징은 간결한 기하학적 요소다. 또 불가근불가원의 시선으로 대상을 은유적으로 촬영한 덕분에 관객은 프레임 속 공간을 유영하며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한마디로 ‘최소 형식, 최대 의미’다. 마르친 리체크를 대표하는 작품은 단연 <눈 속에서 백조에게 먹이를 주는 남자>다. 그림자와 빛의 대비, 눈과 어둠의 조화를 강렬한 흑백으로 포착한 사진은 국제순수예술사진상Fine Art Photography Awards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그를 유명 작가 반열에 올렸다. 이 외에도 전시에선 미국 이민을 다룬 <Emigration>, EU와의 통합을 지지하는 대중들의 시위를 선을 활용해 기록한 <Border> 등 다른 작업도 만나볼 수 있는데, 미니멀리즘 양식을 견지하는 까닭에 마치 중용이 미덕인 세계로 떠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잠실 ‘롯데뮤지엄’은 이 여정의 종착지다. 잠실의 필수 코스는 산책로의 정수 석촌호수다. 석촌호수는 팔색조의 매력을 지녔다. 2.5킬로미터에 달하는 호수 둘레를 걸으며 꽃구경을 할 수 있고, 다양한 문화 행사를 체험할 수 있다. 어떤 날은 물 위에 러버덕과 주얼리 브랜드의 조형물이 떠 있기도, 어떤 날은 수변 무대에 청년 예술가의 공연과 열린 도서관이 오르기도 한다. 걷는 게 살짝 지루해지면, 놀이공원에서 새어 나오는 즐거운 비명을 들으며 같이 웃으면 된다. 야경도 빼놓을 수 없다. 로맨틱 무드와 함께하는 데이트는 애정 지수를 무한정 올려준다. 이처럼 마천루 사이에 있는 석촌호수는 매일 가도 질리지 않는 명소다.

롯데뮤지엄에서 개최 중인 《녹턴시티》(5월 26일까지)는 마천루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 전시다. 작가 윤협이 서울·뉴욕·파리 같은 활기찬 도시를 단순화했다. 어린 시절부터 펑크와 힙합 등 서브컬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자유롭게 누비는 즉흥적 감정과 리듬감을 종이 위에 함축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다. 밤의 옷을 입은 도시가 주는 적막함과 생경함을 밑그림 없이 점과 선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재즈를 좋아하는 취향에서 기인한다. 그는 악보를 그대로 연주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자유로운 영혼이라서일까. 나열된 점과 선을 보노라면 영화 <라라랜드>처럼, 리듬 게임처럼 당장이라도 경쾌한 스텝을 밟아야 할 것 같다. 《녹턴시티》를 즐기는 방법 하나 더. 어스름해질 무렵 전시장에 방문해보자. 롯데뮤지엄이 있는 롯데월드타워에선 밖을 내다볼 수 있는데, 실제 야경과 작가의 그림을 비교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글 럭셔리 매거진 피처 디렉터 박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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