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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5월호

한데 모여 사는 단어들
—먹고살다

“먹고살기가 쉽지 않아.” 단골 식당의 주인 어르신의 말씀이 깊다. 말이 깊다는 것은 헤아릴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섣불리 동조하거나 선뜻 위로를 건네기가 어려워서 한참을 가만있었다. 식재료 가격의 폭발적 인상으로 반찬 가짓수를 줄여야 할지 고민했다는 말씀이 이어진다. “사람을 먹이는 일이 나한테는 먹고사는 일이라는 게 재밌지?” 멀리 선반 위에 놓인 양파와 대파, 고추, 애호박, 감자, 오이 등이 보인다. “그렇지? 그런데 쉽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게 삶이니까.” 어르신의 말씀에 먹먹해지고 말았다. 삶을 한다는 것, 그저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능동적으로 이끌고자 할 때, 삶은 비로소 “하는” 것이 된다. ‘먹고살다’가 한 단어인 것처럼, 먹고 걷고 일하고 쉬고 만나는 일이 모두 삶이라는 단어로 수렴되는 것이다.

‘먹고살다’가 한 단어인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어안이 벙벙했다. 어안이 “어이없어 말을 못 하고 있는 혀 안”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찾아뵐 때마다 할머니께서 “밥은 먹었어?”라고 묻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물음은 실은 “잘 살고 있지?”를 달리 묻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보면 밥을 잘 먹는 일이 잘 사는 일의 기본인 셈이다. 생활의 기본 요소는 의식주 세 가지지만, 개중 먹는 일은 생존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서 생겨난 ‘먹고사니즘’이라는 조어만 봐도, 생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먹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살아 있어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기쁨이지만,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절박함이다.

한편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의 형태로 쓰일 때는 ‘먹고’와 ‘살다’를 띄어 써야 한다. 문장 구성상 목적어가 필요할 때 먹는 일은 사는 일과 잠시 떨어져 있게 되는 셈이다. ‘먹고살다’일 때는 먹는 일과 사는 일 사이에 불가분 관계가 형성되는 데 반해, ‘먹고 살다’일 때는 무엇을 먹는지가 중요해진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주로 먹는지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먹고살다’ 이후에 ‘먹고 살다’가 가능해질 것이다. 생계가 해결되어야 생활이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처럼, 여유가 있어야 취향을 발견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빌어먹다’가 소환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빌어먹다’는 “남에게 구걸하여 거저 얻어먹다”라는 뜻이다. ‘빌다’는 잘 알다시피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하여 달라고 신이나 사람, 사물 따위에 간청하다”라는 뜻이다. 먹기 위해서 풍족한 이에게 간청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러나 이때는 ‘빌다’는 “남의 물건을 공짜로 달라고 호소하여 얻다”라는 뜻이다. 바라는 바와 호소하는 바의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전자의 ‘빌다’가 기약 없는 소원의 형태를 띤다면 후자의 ‘빌다’는 발품 파는 행동을 전제로 한 것이다. “빌어는 먹어도 다리아랫소리 하기는 싫다”라는 속담은 빌어먹을 때조차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함을 보여준다. ‘다리아랫소리’는 말 그대로 머리를 다리 아래까지 숙여서 내는 소리다. 굽실거리거나 애걸할 때 쓰이는 소린데, 이는 자신의 사정을 간곡히 알리는 목적을 가진 ‘호소’와는 엄연히 다르다. 말하자면 ‘빌어먹다’ 속에 ‘빌붙다’는 없다.

‘빌어먹다’는 “빌어먹을!” 형태로도 많이 쓰인다. 그러나 ‘빌어먹을’은 독자적인 뜻이 있는 별개의 단어다. 이는 관형사로 “고약하고 몹쓸”이란 의미다. “빌어먹을 놈의 세상!” 꼴로 한탄할 때 주로 쓰인다. ‘빌어먹을’이 감탄사로 쓰이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속이 상하거나 분개할 때 욕으로 하는 말”이 되는데, 그럴 때면 이 말의 앞이나 뒤에 으레 쉼표를 동반한다. “빌어먹을, 돈을 다 잃었어!”나 “이를 어쩌지, 빌어먹을!” 같은 문장을 떠올려 보라. 분명 어떤 면에서는 빌어먹는 일도 고약할 테지만, “빌어먹을”은 실패 이후에 쓰인다는 점에서 ‘빌어먹다’와 차별화된다. 물론 “빌어먹을, 빌어먹는 일이란!” 형태로 이 둘을 합쳐서 문장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먹고살기의 목표는 다름 아닌 살아남기다. ‘살아남다’의 첫 번째 뜻은 “여럿 가운데 일부가 죽음을 모면하여 살아서 남아 있게 되다”인데, 여기서 죽음은 단순히 삶의 반대말이 아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지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다. 가슴속에 끝끝내 살아남은 희망은 어떻게든 이 풍진세상을 살아가게 해준다. 살아서 남는 일, 그것은 으레 폐허에서 시작되고 생존을 목표로 갱신을 반복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가 함께 살아남기를 바라기도 할 것이다. 삶은 ‘여럿 가운데 일부’에게만 주어진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고받다’가 필요하지만,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고받다’가 절실하다. 한데 모여 사는 단어에 따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그것이 펼쳐지는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먹고살기가 쉽지 않아.” 자리에 앉아 단골 식당의 주인 어르신 말씀을 찬찬히 곱씹는다. ‘먹고살기’와 ‘삶을 하기’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먹고사는 일이 삶을 하는 단단한 토대가 되어 준다는 사실을. 먹고사는 일에 힘써 작은 여유가 생긴다면 그것이 곧 삶을 ‘잘’ 하고 싶은 마음으로 연결되리라는 사실을. 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는 이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도 믿는다. ‘먹고살기 쉽다’보다는 ‘먹고살 만하다’에 가까워질 때, 비로소 여유가 깃들 수 있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쉬운 상태에서는 주변으로 향하는 손길과 발길이 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놀고먹는’ 상태를 꿈꾸면서도 우리는 노는 것과 먹는 것 이외의 영역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다르게 사는 일이, 나만의 삶이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곤궁하더라도 부디 마음만은 남아돌았으면 한다. 베풀기까지 이어지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살필 수 있는 마음만이라도 남았으면 한다. 돌았으면 한다. ‘살아남다’와 ‘남아돌다’ 사이의 거리는 먼 듯싶지만, 살아남는 과정 틈틈이 남아도는 순간을 만들 수도 있다. 남아도는 순간 덕분에 어느 하루도 똑같지는 않다. ‘먹고살아남아도는’ 이상적인 상태를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난다. 한데 모여 사는 단어들 덕분에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글 시인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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