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COLUMN

5월호

여흥의 효율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부자는 시간 부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할 일이 많고 집중력은 저하된 현대인에겐 무언가에 시간을 투자해 몰입하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빨리 감기로 보고, 그것도 부담스러워 이를 요약해주는 유튜브 콘텐츠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한정된 시간과 돈을 효율적으로 쓴다는 자본주의가 여흥에서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요즘 춤 공연은 짧습니다. 단막 공연은 한 시간 남짓이고, 전막 공연이라 해도 두 시간 정도면 끝납니다. 긴 공연의 대표 명사였던 전막 발레의 경우 원작은 세 시간 가까이 되지만 이젠 장면을 줄이거나 아예 막을 합쳐서 두 시간 정도로 압축되었습니다. 공연이 너무 길면 관객들이 부담을 느껴 아예 보러오지 않는다니 제아무리 고전이라도 몸집을 줄이고 있습니다.

여흥은 노동에서 벗어나 즐기는 행위입니다. 여흥은 ‘여유’와 ‘부’를 지닌 상류 계층이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이었고, 노동 계층에서도 일상의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예외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시대의 여흥은 특별한 이벤트였기 때문에 매우 길고 장대했습니다. 발레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궁정 스펙터클 <왕비의 희극 발레Ballet Comique de la Reine>1581는 프랑스 귀족층의 결혼을 축하하는 공연으로 시 낭송과 음악·춤과 함께 마상 발레와 불꽃놀이까지 포함된 구경거리이며, 저녁 10시에 시작해 6시간이나 이어졌습니다. 또한 루이 14세의 대표작인 <밤의 발레Ballet Royal de la Nuit>1653는 13시간 길이의 공연으로 밤새 진행되어 새벽에 끝났습니다.

조선의 여흥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고자 수원으로 행차해 성대한 잔치를 벌인 화성행궁은 무려 8일에 걸쳐 치러졌습니다. 왕복 이동에 걸린 나흘을 빼더라도 나흘간의 잔치 동안 회갑 잔치뿐 아니라 특별 과거 시험과 대규모 군사훈련, 노인을 위한 양로 잔치까지 열렸으며 약 6천 명의 수행원과 말 1,400필이 투입되었습니다. 진찬연에는 무려 14가지의 춤이 추어졌고, 춤과 춤 사이에 술잔을 올리고 시를 읊었습니다.

지배 계층의 여흥이 많은 돈과 시간, 인력을 투입한 볼거리라면 민중의 여흥이라 해서 시간이 짧진 않습니다. 결혼식이나 축제가 열리면 여러 날 이어졌습니다. 전통적인 굿의 경우 해가 떨어진 이후부터 새벽닭이 울 때까지 하는 게 대부분이고 길면 2~3일이 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젠 너무 많은 자극과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춤 공연의 경쟁 상대는 다른 춤 공연이 아니라 유튜브와 넷플릭스, 틱톡과 릴스입니다. 무료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전통적인 여흥의 장르들이 고전하고 있습니다. 여흥에도 효율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여흥의 큰 축인 스포츠 역시 그러합니다. 노동에서 벗어나 ‘여유’와 ‘부’를 기반으로 발달한 스포츠이건만 이제는 소요 시간과 수익이 반비례하는 산업이 되었습니다. 공연예술이 장르와 상관없이 대체로 한두 시간에 끝난다면, 스포츠는 종목마다 경기 시간이 상당히 차이 납니다. 축구처럼 정해진 시간 치러지는 종목도 있지만 특정 세트 수를 채워야 하거나 특정 스코어를 획득해야 끝나는 종목의 경우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의 초 단위 시간 감각에 익숙해진 대중 가운데 서너 시간의 경기를 인내심 있게 관람하거나 시청할 이는 급감하고 있습니다. 이에 스포츠계는 경기 시간 줄이기에 목매고 있지요. 종목을 막론하고 선수들의 준비 시간이나 교체 시간을 줄이고 시간을 잡아먹는 규칙을 없애고 있습니다. 농구에서는 공격권을 지닌 팀의 슛 제한 시간을 줄였고, 배구와 배드민턴에선 서브권을 가진 팀만 득점을 올리는 방식을 없앴습니다. 모두 경기 시간을 단축하고 박진감을 높여 관객의 이탈을 막기 위한 방법입니다.

몇 분, 몇 초라도 줄이고자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여간해선 꿈쩍도 하지 않는 종목도 있습니다. 테니스입니다. 테니스 경기는 점수를 모아 게임으로, 게임을 모아 세트로 이어집니다. 6게임을 먼저 따야 한 세트를 이기며, 총 3세트 중 2세트 혹은 5세트 중 3세트를 먼저 따야 이깁니다. 그런데 선수들의 실력이 막상막하인 경우 경기 시간이 한없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유독 ‘혈투’가 많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네 시간을 넘기기란 자주 있는 일이고, 2010년 영국 윔블던대회에선 무려 9시간 58분 동안 경기가 열린 적도 있습니다. 오후 2시에 시작하여 밤 9시까지 경기하다가 다음 날에 이어서 경기를 치렀다고 합니다. 이처럼 경기 시간이 예측 불가능하니 텔레비전 중계는 어렵겠지요. 효율과 예측 가능성이 곧 돈인 세상에 신진 팬층을 유입하기 어려우니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그럼으로써 잃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여흥에서 효율을 높일 때 잃는 것이 뭘까요? 존재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전통주의자나 낭만주의자의 한가한 소리는 아닐까요?

공연예술에선 간혹 대책 없는 길이감과 지루함을 감행하고 감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2021년 금배섭 안무가가 이끄는 춤판야무의 공연 <오>는 무려 5시간 반 동안 다섯 편의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전부 솔로 작품으로, 전체 출연자가 안무가를 포함해 단 둘이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인근 카페에서 떡과 음료수를 제공해주어 출출함을 달래며 공연을 보았습니다. 기껏해야 50여 명의 관객이 딱딱한 소극장 의자에 앉아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솔로를 연달아 보는 것은 개별 작품을 감상하는 것 너머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휨닝엔Skymningen>도 기억납니다. 모르텐 스퐁베리Mårten Spangberg라는 안무가의 이 작품은 문화비축기지의 어두컴컴한 탱크 공간에서 2시간 10분 동안 펼쳐졌습니다. 두 시간을 넘는 물리적인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두 시간 내내 별다른 사건 없이 무용수들이 누워 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광경을 보아야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스펙터클한 자극에 익숙한 현대인으로서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는 이 작품을 보아내기가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생각나는 걸 보면 <오>도, <휨닝엔>도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긴 시간을 견뎌내며 관객과 출연자가 함께 무언가를, 혹은 무언가의 부재를 경험한다는 감각을 일깨워주었으니까요.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여흥의 효율화라는 흐름에 맞서 자극과 박진감을 멈추고 빈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여흥의 본질은 자본이나 자극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니까요.

글 무용평론가 정옥희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