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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2월호

어설픈 작사론

보고 읽을 때 좋은 글과 부르고 말할 때 좋은 글은 다르다. 지난 호에서 가사 이야기를 꺼낸 김에 조금 더 이어가보려고 한다. 작사가로서 나는 보고 읽을 때 좋은 글에서 도무지 벗어나기가 어렵다. 흰 종이 배경에 틀린 글자 없이 열을 맞춰 정갈하게 완성된 글을 보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작사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본분을 망각한 나는 누군가 내가 써놓은 가사를 읽으며 감탄해주기를 기대한다. 물론 멋진 ‘들림’을 위해 애쓰긴 하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국어 시간을 좋아했고, 그 덕에 수능 시험에서 유일하게 언어 영역만 1등급을 받았으니 나는 아주 오래 맞춤법에 맞는, 비문이 없는 글을 쓰는 훈련을 착실히 받아온 셈이다. 그런데 그 모든 논리와 맥락보다 소리의 영역을 우선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좋은 가사란 무엇인가. 요즘 느끼는 바로는, 사람들에게 좋은 가사라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개의 허들을 넘어야 한다. 첫째로는 느낌이 좋아야 한다. 이때의 느낌이란 뉘앙스, 어감, 말맛 같은 것을 의미한다. 멜로디에 착착 붙고, 입에도 착착 붙는 그런 느낌 좋은 가사들이 있다. 두 번째로는 그 내용이 꽤 함축적이어서 곱씹을수록 의미도 좋고 마음에 울림이 있는 표현들이다. 첫 번째 조건인 뉘앙스와 어감만 좋다면 경박해 보일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인 의미만 훌륭하다면 영 재미가 없어 듣는 이의 흥미를 일으키기 어렵다.

첫 번째 조건을 좇다 보면 두 번째를 놓치기가 쉽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한 훌륭한 가사도 많다. 잘 쓰는 작사가의 가사는 듣는 이와 글로 만나지 않는다. 그림으로, 하나의 장면으로 만난다. 듣기만 해도 그 서사가 눈앞에 이미지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안에 몰입하면, 반복해 듣다 보면 그 세계를 더 사랑하게 된다.

내가 쓴 가사 중 승희(오마이걸)의 라는 곡이 있다. 스스로 뿌듯한, 가장 아끼는 곡이다. 획일적인 입시교육 체제 속에 꿈을 잃고 지쳐가는 십 대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썼다.

나란 나란하게 선을 맞춰서 마냥 헤아려지는 내 미래 / 낯선 모양으로 부푼 이 마음 다시 반듯이 반듯이 착하게 다려 / 같은 타임라인 위에 뽀얀 얼굴들 자꾸 생기를 더 잃어가 서로가 다른 밤을 숨겨 온 걸 / 삐죽 튀어나온 발끝 용기를 디뎌 상상이 아냐 밤을 밝혀

꽤 창의적인 표현들로 나름의 세계를 잘 그려 보였다고 자평하지만, 이 세계가 듣자마자 눈앞에 장면으로 펼쳐지느냐, 묻는다면 아쉽긴 하다. 부르기에 어색하지 않고, 읽었을 때 꽤 멋진 대목들이 있지만 ‘듣기’와 ‘상상하기’가 더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김이나 작사 IVE(아이브)의 <I AM>은 성공 사례다. “너는 누군가의 Dreams come true / 제일 좋은 어느 날의 데자뷰 / 머물고픈 어딘가의 낯선 뷰”는 예쁘고 멋진 단어들의 집합이자 이것들로 구성된 문장은 되새길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좋은 가사의 좋은 예시다.

최근에는 그룹 멤버 방찬·창빈·한이 공동 작사한 Stray Kids(스트레이 키즈)의 <특>이라는 곡을 들으면서도 감탄했다. “여긴 Seoul 특별시”라는 가사로 노래가 시작되는데, 이후 “가려진 별들 사이 떠오르는 특별”, “특별의 별의 별의 별의 별의 별의 별의 별난 놈 That’s me”, “class는 특” 같은 가사들이 이어진다. 이 곡의 가사는 글이 아니라 음악이다. 서울특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하는 뮤직비디오와 함께 감상하면 더 재밌다. ‘특별’과 ‘특’과 ‘별’이 각각 쪼개져 어감으로도, 의미로도 제 기능을 한다.

시대를 확 건너뛰어 보자면, 대중음악 분야에서 훌륭한 가사로 종종 언급되는 곡으로 박주연 작사 김민우의 <입영열차안에서>가 있다. 도입부 몇 줄만으로 듣는 이들을 특정 상황에 단숨에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라는 첫 줄은 어색하다는 표현이 가진 의미와 어색해‘진’의 어미에 담긴 화자의 상황,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마음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 대상이 전부 드러나는, 그야말로 대중음악사에 길이 기록돼야 할 명인의 작문이다. 작사가인 박주연이 최근에 쓴 성시경·나얼의 <잠시라도 우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떠나간 모든 것은 시간 따라 갔을 뿐 우릴 울리려 떠나간 건 아냐” 같은 어른의 표현을 나도 십 년쯤 흐르면 가져볼 수 있을까.

작사의 세계란 그 재미가 무궁무진하다. 나는 늘 전투적인 자세로 잘 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패배의 순간까지 포함해 재미있었다. 더 궁금한 이가 있다고 하면 들려줄 이야기도 많다.

김호경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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