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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2월호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박서보

우리나라에 이런 화가가 있었다. 손은 시퍼렇게 멍이 들기 일쑤였다. “붓을 쥐고 연필을 쥐고 하니 손이 시들시들하더니 이 속에서 핏줄이 터진 거야.” 날마다 여섯 시간 이상을 그림에 매달렸다. 긋고 지우고 긋고 지우고… 지난 2월에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항암 치료도 거부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 그냥 그림을 그려보자.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는 게 낫지.”

파킨슨병까지 겹쳤다. 캔버스에서 달달 떨리는 손.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떨리면 떨리는 대로 그리면 돼.” 기침도 잦아졌다. “죽을 때가 되었구나.”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내가 할 일이 너무 많거든. 잡아가려면 할 일 적은 놈 잡아가지. 나처럼 할 일 많은 놈 먼저 데려가려고 하나.”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 지난 10월 14일 92세 일기로 별세했다. “아직 죽기는 참 억울하다”며 연필을 손에서 놓지 않던 그가 세상을 어떻게 떠났는지를 생각하면 쓸쓸해진다.

갑자기 몸이 허약해져 병원에 입원한 박 화백은 금방 나올 줄 알았다. 며느리에게 “나가면 작업할 게 너무 많다”며 “(캔버스) 배접해 놓아라” 하는 당부는 마지막 말이 됐다. 이틀 후 그는 벚꽃이 피는 날 환히 웃으며 찍은 영정 사진으로 나타났다.

그는 ‘한국미술=박서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 ‘바로 제가 훗날 이 나라의 대가가 된다’고 자신만만하며 화가로서 승승장구했다. 작품이 팔리지 않던 2000년대 초반에는 이런 말도 했다. 중국 유명 미술평론가 황두黃篤가 “한국에 위대한 작가 박서보가 있다. 중국 작가들이 한국의 박서보를 가장 닮고 싶어 한다”는 글을 발표했을 때다. 당시 그는 “나는 애당초 그런 걸 생각하고 있으니까, 처음으로 알아챈 놈이 있구나”라며 의기양양했다. 2010년 인터뷰 때는 자신이 곧 “100만 달러, ‘밀리언 달러 작가’가 된다”고 했다. 당시에 그 말은 그저 자신감에 찬 허세로 들렸다.

언제나 ‘누가 뭐래도 내가 1등’, ‘아시아 최고 작가’라며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에 찬 말은 사람들을 질리게 했지만, 그 말들은 모두 이뤄졌다. 2012년부터 그의 오래된 ‘묘법’이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10년 전보다 작품값이 20배 상승했다. 2017년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묘법 No.10-79-83>이 한화 약 14억 7,400만 원에 팔리면서 밀리언 달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붓을 놓는다’는 팔순 이후부터 후끈한 봄날이 이어진 행복한 화가였다. 별세 전 열린 소더비 홍콩 10월 경매에선 1975년 작 ‘연필 묘법’이 한화 약 35억 원에 낙찰, 작가 최고가를 경신했다.

60년 역사를 관통한 ‘연필 묘법’은 박서보의 브랜드다. 1967년 둘째 아들이 3살 때였다. “국어 노트가 방안지처럼 되어 있잖아. 칸 속에 ‘한국’이라는 것을 쓰려고 하는데 칸 속에 들어가지가 않는 거야. 저도 그걸 아니까 화가 나지. 에이익 하고 슥슥 그어버리더라고. 그걸 내가 보면서 저게 체념이로구나. ‘연필 묘법’은 걔(아들)를 흉내 낸 거야.”

그는 지난 3월 제주에서 행복한 모습을 보였다. 제주 서귀포시 JW메리어트호텔에 짓는 박서보미술관 기공식에 참석, 환한 웃음을 짓고 창작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이곳(박서보미술관)을 찾는 모든 이가 제주의 자연과 함께 예술과 호흡하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었으면 한다”며 기뻐했다.

생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로 불렸다. 20대부터 2009년까지 매일 14시간 작업했다는 말은 미술계에 전설처럼 남았다. “내 예술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다. “과정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태도거든. 그림은 수신하는 도구”라고 늘 강조했다. “수신을 하기 위한 수행의 도구, 수행 과정의 찌꺼기가 그림”이라며 자신을 담금질했다. 모습도 스님처럼 변해갔다.

“슬럼프 수없이 겪었지.” 끈질긴 화가였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는 거지. 내가 연필 작업을 1986년에 그만두거든. 그런데 1982년부터 한쪽에서 한지 작업을 하는 거야. 밤에 나만 보는 데서….”

“세상에 계속 변해가잖아. 나만 정지됐다는 것은 죽었다는 거거든. 예술은 시대를 표현하는 거니까. 시대가 변하면 나도 함께 변해가야 옳다는 거지.” 예술은 손재주의 표현이 아니다. “끝없는 반복 과정의 행위 반복을 통해서 순화가 되어간다”는 것. “물감을 지우는 작업, 인격이 이뤄져야 예술이 이뤄지는 거야. 품격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예술이 나타나는 거거든.”

좋은 예술가나 좋은 지도자는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그는 사람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지구가 병동화된다면서 “그러면 화가로서 어떻게 가야 할 것이냐. 사람들을 치유해야겠구나.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고, 나는 늘 관찰하면서 느끼는 거지”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시작된 게 ‘색채 묘법’이다. “자연의 색을 치유의 도구로 끌어들이자. 내가 처음에 ‘공기색’으로 이름 붙인 작품이 있어. 하늘색하고 바다색을 교묘하게 배합하면서 흰색을 많이 섞어서 제작했지. 제작해 놓고서 그림을 보니 내가 심호흡을 하고 있더라고. 휴~”

작업실에는 배접된 캔버스들이 잔뜩 쌓여 있다. 1년 전 저걸 어떻게 하냐고 묻자 무심하게 말했다. “몇 년 걸려서라도 해내겠다는 거지. 그래도 상관없어. 할 거니까.” 그는 하늘에서도 긋고 지우고 긋고 지우고 긋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을 것 같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변화해도 추락한다.” 묘비에 새겨진 그의 어록. 그때는 채 알아듣지 못했다. 모든 인간사 공포를 뚫고 나온 명언이다.

박현주 뉴시스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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