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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장용수와 양소운 실향민이 지킨 해서탈춤

한국 탈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참 기쁘다. 앞으로 더 많은 젊은이가 전통 탈춤을 기반으로 다양한 탈춤 공연을 만들게 될 것 같다. 전통 탈춤은 지역적으로 특색이 강하다. 인천 태생인 나는 특히 해서 지방海西地方에 끌린다. ‘해서탈춤’ 하면 특히 두 사람이 떠오른다. 장용수莊龍秀, 1903~1997와 양소운梁蘇云, 1924~2008. 장용수는 황해도 은율 태생이요, 양소운은 황해도 재령 태생이다. 인천시 미추홀구 수봉공원에 은율탈춤전수관이 있다. 1983년 설립되기 이전에는 어디에서 해서탈춤을 췄을까? 인천시 동구 송현동 100번지의 인천국악원에서 장용수와 양소운이 가르쳤다. 지금 인천국악원은 동인천역 북광장의 한 귀퉁이로 변했다.

여름이면 건강한 땀 냄새로 충만하던 경아대

양소운은 인천 자유공원 아래 내동 5번지에 살았다. 여러 제자가 들락날락하며 노래와 춤을 익혔다. 양소운은 1963년 세워진 율목공원에 있는 경아대景雅臺에서도 가르쳤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여름방학이 되면 경아대에 대학생 무리가 모여들었다. 해서탈춤을 배우기 위해서다. 20~30명의 학생은 거기서 먹고 자기까지 하면서 탈춤을 익혔다. 지금은 그리 넓게 보이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보다 더 많은 인원을 수용했다. 여름날 젊은이의 건강한 땀 냄새가 밴 경아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1967년, 양소운은 봉산탈춤으로 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으나 은율탈춤, 해주검무를 가르치는 데도 힘을 썼다. 당시 이은관의 배뱅이굿이 유명했지만 양소운의 배뱅이굿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탈춤을 배우는 학생들이 청하면 양소운은 즉흥적으로 배뱅이굿 타령을 불러주기도 했다. 황해도의 가무악희歌舞樂戱는 양소운의 신앙과 같았다.
1973년 5월 27일 일요일 오후 1시, 인천에 사는 실향민이 대거 서울 국립극장에 모였다. 황해도민속예술보존협회를 만든 양소운이 〈황해도 민요발표회〉를 열었다. 장용수와 양소운 등 스무 명의 황해도 출신 실향민이 하나가 돼서 고향의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영향이었을까? 1975년 10월 24일, 황해도 지역의 민요가 더 큰 주목을 받으면서 공연을 했다. 〈명창대향연〉이라는 제목으로 사흘간 펼쳐졌는데, 첫날 공연은 노래를 사랑하는 김창구 극장장이 기획했다.
김창구金昌九는 누구인가? HLKA(현 KBS)의 음악계장 출신이다. 그가 만든 라디오 프로그램이〈노래자랑〉이다. 1955년 7월 1일 처음 방송됐다.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아마추어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었다. 프로듀서는 김창구, 진행은 장기범 아나운서였다. 당시 동아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열렸다. 김창구는 신조가 있었다. 한민족만큼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은 없다. 노래는 언제나 국민의 힘이 되고, 노래 프로그램은 언제나 성공한다는! 방송국 프로듀서 시절 KBS 전속가수를 발굴하고 양질의 음악 프로그램을 만들던 김창구는 극장장이 돼서 실향민을 위한 노래 공연을 성사시킨 것이다.

1997년 10월 인천 수봉공원 놀이마당에서 열린 양소운의 탈춤 공연

북쪽 스승과 남쪽 제자의 눈물 겨운 상봉

1990년 12월 9일과 10일 이틀간 〈송년통일음악회〉가 열렸다. 9일은 예술의전당에서 남쪽이 먼저 시작했고, 10일은 국립극장에서 북쪽이 먼저 시작했다. 북한의 최고령 성악가(서도명창)이자 인민배우 김진명은 10일 공연에서 남쪽의 제자 양소운(당시 봉산탈춤 인간문화재)과 만났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김진명은 객석에서 나오기 시작한 추임새를 보고 놀랐다. 제자 양소운의 추임새였다. 공연이 끝난 후 분장실에서 만난 김진명이 제자 양소운을 보고 한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왜 이렇게 늙었어!” 두 사람은 얼싸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1994년은 ‘국악의 해’였다. 설날을 맞아 서울놀이마당에서는 2월 10일 봉산탈춤, 11일 은율탈춤을 선보였다. 각각 양소운과 장용수가 제자들과 함께 출연했다. 젊은 제자들이 춤을 잘 추는 것이 대견했지만 나이 지긋한 인간문화재 두 사람은 세월과 나이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용수는 마당판에서 예전만큼 춤을 추지는 못했으나 북한 지역의 토속민요를 알리는 데 힘을 썼다. KBS-FM에서 녹음한 〈북한지역의 토속민요〉에는 장용수, 고초재, 안승삼이 함께 부른 ‘황해도 배치기소리’가 실렸다. 이 노래를 녹음하면서 혈기 왕성했던 자신들의 20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전쟁과 가난으로 어려운 시절에도 탈바가지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던 이들. 이런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이들이 지켰기에 한국 탈춤이 존재한다. 한국 탈춤을 세계 탈춤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21세기의 우리가 20세기의 이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장용수

장용수의 은율탈춤 전수발표 공연 자료

윤중강_국악 평론가 | 사진 제공 윤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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