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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이재은, 임지선 감독의 〈성적표의 김민영〉 콩가루와 콩고물, 나와 우리

〈성적표의 김민영〉(2022)

감독 이재은, 임지선
출연 김주아(정희), 윤아정(민영), 손다현(수산나), 임종민(정일)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 갇혀 오직 수능만 준비하던 시절에는 너와 내가 이렇게 다른 길 위에 서 있을 줄 몰랐다. 그때 우리는 크기만 살짝 다른, 다 같은 콩이라고 생각했다. 경계에 서서 아직 자라지 않은 것이 당연하던, 같이 있기에 우리는 같다고 생각하던 시간이었다. 막연하게 잘될 것 같았던 미래가 어느 사이 켜켜이 쌓인 벽돌로 꽉 막힌 현재가 돼 나타날 줄 몰랐다. 그리고 같은 콩이던 우리가 콩가루와 콩고물만큼 다른 존재가 돼 있을 줄 몰랐다.

성적표의 우리

김민영(윤아정), 유정희(김주아), 최수산나(손다현)는 고등학교 시절 삼행시 클럽을 만들어 우정을 나눈다. 졸업 후 민영은 대학생이 되고, 정희는 아르바이트생이 되고, 수산나는 유학을 간다. 절대 깨어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우정이라고 믿었지만 각자 다른 생활 속에서 세 친구의 관계는 소원해진다. 그러다 정희는 민영의 집에 가게 되고, 학창 시절처럼 즐거운 시간을 기대했지만, 민영은 기말고사 성적표를 정정하느라 바빠 정희를 신경 쓰지 않는다. 10대 시절, 마지막 즈음에 나의 학창 시절 12년을 평가한 것은 수능 성적표였다. 성적표대로, 성적표가 나눠놓은 가이드라인을 따라 우리는 각기 다른 길 위에 서서 스무 살이 됐다.
대학을 가거나, 취직을 하거나. 그저 막연하기만 하던 미래에 희미하고 좁은 길이 생긴다.〈성적표의 김민영〉은 경계를 넘어버린 20대 초반, 어떤 것도 될 수 있지만 사실 어떤 것도 되지 못한 시간의 외로움과 막막함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수능을 본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절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이성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과격하게 이야기하는 상상 가능한 성장 코미디와 달리 〈성적표의 김민영〉은 달뜨고 낯 뜨거운 이야기 없이 그저 평범하던 그 시절의 우리로 돌아간다. 닮은 것 같지만 아주 다른 세 친구 중 하나는 확률적으로 나와 닮았다. 누구에게 마음을 주는지에 따라 영화를 보는 마음과 온도도 달라진다.

우리의 성적표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상대방이 원하는 나의 모습과 실제 내가 품을 수 있는 마음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탓하지 않는다. 그저 입장이 다른 것일 뿐 상대의 마음에 가닿지 못한 마음의 무게와 오직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의 무게 중 어떤 것이 더 묵직하고 의미 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다른 길 위에 서서 다른 시간을 보낸 민영과 정희, 함께한 시간이 사라진 만큼 나눌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어 있다. 둘의 대화는 툭툭 끊기고 함께하는 시간은 다소 서먹하고 어색하다. 정희는 자꾸 과거를 사진첩처럼 끄집어내 우리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데 민영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꾸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 당장 살아내야 하는 오늘이 가장 버거운 우리는 어느새 우리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어른이 됐다. 어린 시절, 관계와 소통을 원하던 우리의 작은 바람은 어른이 된 후 보니 실은 아주 큰 바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테니스를 치는 것과 비슷하다. 훈련과 눈치, 그리고 경계가 필요하다. 잘 들여다보고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누군가는 계속 공을 치고 누군가는 계속 뛰어다니며 공을 주워야 한다.
어른거리는 길 위를 어슬렁대던 하루의 끝, 관계의 본질을 관찰하는 정희의 맑은 시선은 가닿지 않았지만 소중한 그 시절 우리의 마음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래서 풀썩대며 부산스럽던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은, 여전히 우리를 한 그릇에 담아둔 정희가 품은 마음의 온도가 월컹대는 우리의 시간을 토닥토닥 다독여 준다.

최재훈_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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